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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 데이비드 흄

by mubnoos 2021. 1. 28.

인간이란 무엇인가 / 오성·정념·도덕 본성론

데이비드 흄 David Hume
(존 로크 다음 영국 경험론자)

 

 

1편 오성

 

인간학이 다른 모든 학문을 위한 유일하고 굳건한 바탕인 것처럼, 이 인간학 자체에 제공될 수 있는 유일하고 굳건한 바탕은 경험과 관찰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시험 본위의 철학은 자연계 주제에 적용된 이래 1세기 이상이 지나 가까스로 정신적 주제에도 적용되게 되었는데, 이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13

 

나는 분명히 외부 물체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본질도 알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외부 물체의 경우처럼, 신중하고 정확한 실험, 그리고 서로 다른 여건과 상황에서 일어나는 개별 결과에 대한 관찰 등을 제외한 다른 방식으로는 정신의 능력과 성질에 관한 어떤 개념도 이룰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14

 

어떤 사람이 눈이 보이지 않거나 귀가 들리지 않게 태어났을 때처럼 우연히 어떤 인상을 일으키는 기능들이 완전히 장애를 받는다면, 인상들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그 대응관념도 잃어버리게 된다. 22

 

관념은 그것 자체의 반영을 새로운 관념으로 낳는다. 그러나 최초의 관념이 인상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는 한, 단순 관념은 모두 직접 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그 대응 인상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은 여전히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성학에서 내가 확립한 제1원리 이며, 그 생김새가 단순하다고 해서 이 원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23

 

복합 관념으로 합치기에 가장 알맞은 단순 관념을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가리켜 주므로, 이 힘은 일상적으로 널리 퍼져 있으며, 무엇보다도 각 나라마다 언어들이 서로 아주 엇비슷하게 대응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합을 일으키고, 또 정신이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나아가게 하는 성질에는 세 종류가 있다. 바로 비슷함, 시간이나 장소의 이웃함, 원인과 결 과이다 30

 

이러한 관념들을 하나로 만들거나 합하는 결과들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 만한 것은 사유와 추리의 일상적 주제들인 복합 관념, 즉 일반적으로 단순 관념들 사이의 어떤 합일 원리에서 발생하는 복합 관념이다. 이 복합 관념들은 관계, 양태, 그리고 실체로 나누어질 수 있다. 32

 

 

관계는 두 관념을 상상 속에서 연결하고 한 관념에서 다른 관념을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성질을 뜻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공상에서 두 관념이 자의적으로 하나로 합치는 경우라 해도 우리가 그 관념들을 비교하기에 알맞다고 생각하는 개별적 여건을 뜻한다. 일상 언어에서는 관계라는 말이 늘 전자의 뜻으로 쓰인다.  33

 

 

우리는 그 관념들이 별 어려움 없이 7가지 주요 항목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항목들은 모든 철학적 관계의 근원으로 생각해도 좋다.

첫째, 서로 비슷한 성질이다.
둘째, 동일성
셋째, 시공의 관계
넷째, 양이나 수
다섯째, 두 대상이 똑 같은 성질을 두루 가지고 있을 때, 그 대상들이 지닌 성질 정도
여섯째, 반대 곧 상반성의 관계
일곱째, 물과 불, 뜨거움과 차가움 같은 경험상 대상들의 인과관계. 34-35

 

실체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실체 관념은 반성의 인상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반성의 인상은 정념과 정서로 되돌아 간다. 아마 이 정념과 정서들 가운데 어떤 것도 실체를 결코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별 성질들의 집합 관념과 갈라놓는 실체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실체에 관해 언급하거나 추리할 때 어떤 다른 뜻도 지니지 않는다. 36

 

모든 관념은 인상으로부터 비롯하며 인상의 模寫 또는 재현일 뿐이므로, 관념에 적용되는 것은 인상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인상과 관념은 오직 그 강렬함과 생동성에서 차이가 있다. 39

 

우리는 그 이름을 들으면 그 대상들 가운데 하나의 관념을 다시 나타내며, 상상은 그 대상의 모든 개별 여건들과 비율로서 그 대상을 표상하게 된다. 그런데 마음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관념과 여러 측면에서 서로 다른 개별자들에게 이러한 똑같은 단어가 자주 쓰이 는 것으로 가정된다. 하지만 그 단어는 모든 개별자들의 관념을 다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자극할 뿐이다. 40

 

관념이 당장 요구될 때마다 그 개별자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습관에 의해 나머지 개별자들이 표상될 뿐이라는 것은 아마도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이 곧 추상관념과 일반 명사의 본성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어떤 관념들이 그 본성에서는 개별적이지만, 다른 것을 대표한다는 점에서는 일반적이라는 역설에 관하여 밝혀낸다. 개별 관념은 일반 명사와 함께 함으로써 일반적인 것으로 된다. 42

 

지구라는 구 전체는, 아니 온 우주는 하나의 단위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하나’라는 말은 정신이 자신을 끌어 모은 대상들의 어떤 양에 쓰는 허구의 명칭인 것이다. 그와 같은 단일성은 얼마의 수와 마찬가지로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 결국 그 단일성도 실제로는 얼마쯤의 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혼자 존재할 수 있고 자기 존재가 모든 수의 존재에 필수적인 단일성은 애초에 종류가 다르며 완전히 불가분적이어야 하고, 더 작은 어떤 단일성으로도 되돌아 갈 수 없어야 한다. 52

 

정신이 똑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능적 존재의 관념을 포함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 무엇도 절대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 형이상학에서 확립한 근본원칙이다. 우리는 황금 산의 관념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산이 실제로 있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골짜기 없는 산의 관념은 이룩할 수 없으므로 그러한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53

 

근본원리에 따르면 서로 다른 것들은 모두 구별될 수 있고, 구별될 수 있는 것은 모두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대상들이 다르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구별될 수 없고 구별될 수 없다면 나눌 수 없다. 그런데 이 두 번째 근본원리를 우리에게 잇따라 일어나는 지각과 비교해보면 이 근본원리는 시간의 경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른 인상들과 뒤섞여 있으면서도 그것들과 분명히 구별될 수 있는 개별인상에서 시간관념이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상들이 그 수에 대한 인상을 만들지 않고 정신에 나타나는 방식에서 시간관념이 일어난다. 57

 

 

우리는 관념을 언어로 대신 사용한다. 대개 정신이 오해하기 쉬울 정도로 관념과 언어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늘어놓은, 볼 수 있거나 만질 수 있는 점들의 합성에 불과한 연장을, 우리가 볼 수 있거나 만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거리관념으로 대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인과와 유사의 두 관계가 함께 돕고 있다. 83

 

존재 관념은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의 관념과 완전히 똑같다. 우리가 단순히 어떤 것에 대해 반성하는 것과, 존재하는 그것에 대해 반성하는 것은 서로 일치한다. 존재 관념은 어떤 대상 관념과 결합된다 해도 그 대상관념에 어떤 것도 추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관념은 존재관념이다. 그리고 존재관념은 우 리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관념이다. 89

 

미워하는 것, 사랑하는 것,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보는 것 따위 이것은 모두 지각하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정신에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지각일 뿐이고 모든 관념은 그보다 먼저 정신에 나타나는 어떤 것에서 비롯된다. 결론적으로 관념 및 인상들과 뚜렷하게 다른 어떤 것의 관념을 우리가 생각하거나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90

 

철학적 관계에는 서로 다른 일곱 가지 종류가 있다. 즉 유사, 동일, 시간과 장소의 관계, 양이나 수의 비례, 어떤 성질의 정도, 반대, 인과성 따위이다. 그런데 이 관계들은, 우리가 관련시켜 비교하는 관념들에 온전히 의존하는 관계와 그 관념들에게 어떤 변화가 없어도 변할 수 있는 관계 따위의 두 가지 부류로 나뉠 수도 있다. 91

 

일곱 가지 철학적 관계들 가운데 오직 관념에만 의존함으로써 지식이나 확실성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관계는 네 가지로 제한된다. 이 네 가지 관계가 유사, 반대, 성질 정도, 양 또는 수의 비례이다. 이 관계들 가운데 세 가지는 첫눈에 발견할 수 있으며, 논증보다는 직관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 더 알맞을 것이다 91

 

그렇다면 관념들에만 의존하지 않는 세 가지 관계들 가운데 오직 하나뿐인 감관을 뛰어넘어 우리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존재들과 대상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오직 인과성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논증에 따르면 모든 것은 반드시 원인을 가져야만 한다. 원인이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를 생산한 것이다. 즉 그것은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하는 셈인데 이는 불가능하다. 103

 

모든 새로운 생산에는 각각 하나의 원인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지식이나 어떤 학문적 추론에서 이끌어 낸 것이 아니므로 항상 경험이 나 관찰에서 비롯된다. 그러면 다음 문제는 당연히 경험이 어떻게 그런 원리의 근원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 104

 

오직 생동성만이 기억 및 감관을 상상과 구별해 줄 수 있다. 이 경우에 믿는다는 것은 감관의 직접 인상을 느끼는 것이거나, 또는 기억에 있는 인상의 반복을 느끼는 것이다. 지각의 힘과 생동성만이 판단 작용의 주된 성질이며, 우리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밝히고자 할 때 그 힘과 생동성은 지각을 기초로 하는 추론의 토대를 마련한다. 110

 

대상들의 관련이나 관계에서 정신이 기억이나 감관의 직접적 인상을 넘어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인과 관련 또는 그 관계이다. 우리는 오직 이 관련 또는 관계를 기초로 삼아야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을 미루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과 관념은 경험에서 비롯하는데, 이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지난날 실례들 가운데 특정 대상들이 서로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13

 

나는 관념들을 연합하는 일반 원리들은 오직 유사, 인접, 인과 따위 이 세 원리들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116

 

어떤 대상의 인상이 우리에게 나타나면, 정신은 곧 그 인상을 항상 따르는 대상에 대한 관념을 이룬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앞에 나타나는 인상과 관계되거나 연합된 관념이라는 의견이나 신념에 대한 정의의 일부로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인과성은 인접, 계기 그리고 항상적 결부를 포함하는 것으로서는 철학적 관계이다. 그렇지만 오직 인과가 자연적 관계이고 관념들 사이의 합일을 만들 어 내는 한에 있어서만 우리는 인과에 따라 추리할 수 있고 인과로부터 어떤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17

 

정신에 나타나는 지각은 인상과 관념이라는 두 종류이다. 이 지각들은 힘과 활기의 정도가 다르다는 점에서만 서로 구별된다. 관념은 인상으로부터 모사되었으며 인상은 모든 부분을 다시 나타낸다. 따라서 어떤 대상의 관념을 조금이라도 바꾸려면, 그 관념의 힘과 활기를 키우거나 줄일 수 있을 뿐이다. 120

 

어떤 인상이 나타난다면 그 인상은 자기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관념으로 마음이 움직일 뿐만 아니라 힘과 활기의 일부를 쪼개서 이와 관계 있는 관념으로 전달한다. 123

 

거리는 명백하게 모든 관념들의 힘을 감소시키며, 우리가 어떤 대상을 다룰 때 그 대상 자체가 감관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상은 정신에 대해서 직접 인상과 거의 같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확실히다. 대체로 어떤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곧 정신을 그 대상과 이웃한 어떤 것으로 옳아가도록 만들지만 뛰어난 생동성을 지니고 정신이 옳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오직 그 대상의 실재적 현전일 뿐이다. 124

 

오직 현재 인상과의 관계에서만 이 관념이 발생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념은 관념에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으며, 관념을 생각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뿐이고 관념을 더욱 강력하고 생생하게 한다. 관계의 영향에 대한 지금의 결론은 이 모든 단계들의 직접적 결과이고, 그리고 나에게는 이 모든 관계들이 절대 확실하고 오류가 없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여기서 설명한 심적작용에는, 현재 인상과 생생한 관념과 공상에 있어서 이러한 인상과 관념과의 사이에 관계 즉, 연합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류의 여지도 전혀 없다. 126

 

우리는 지금까지 원인과 결과를 제외하고도 유사와 인접이라고 하는 두 관계가 사유의 원리들을 연합하며, 상상력을 하나의 관념으로부터 다른 관념으로 옮겨주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해 왔다. 131

 

유사의 관계는 여기서 경험에 따라 합일되며, 우리가 그 대상들은 절대 분리될 수 없다고 상상할 정도로 그 대상들을 가장 가깝고 밀 접한 방식으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유사성은 경험과 동일하거나 또는 경험에 필적할 만한 영향을 갖는다. 그리고 경험의 유일한 직접적 결과는 관념들을 모아서 연합하는 것이므로, 나의 가설처럼 모든 신념은 관념들의 연합에서 생긴다. 136

 

우리에게 인간의 진실성을 보증해 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지배하는 원리들인 우리의 경험뿐이다. 그러나 경험이 다른 모든 판 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진실성에 대한 참된 기준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완전히 경험에 따라 스스로를 규제하는 것은 매우 드물어서 오히려 일상적 경험이나 관찰과 반대된다고 하더라도 유령과 마법 그리고 불가사의한 조짐과 같은 것조차도 일단 들은 것은 무엇이든지 믿는 놀라운 성향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137

 

반복에 의해서 판단력 또는 오히려 상상력이 감관, 기억, 이성 등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관념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정신에 작용할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강력하게 각인된 관념들을 가질 수 있다. 또 그 관념들을 완전한 양상으로 표상할 수도 있다. 실제로 교육은 우리 가 원인과 결과로부터 추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습관과 반복이라는 동일한 기초 위에 확립되지만, 그것은 인위적 원인이지 자연적 원인은 아니다. 또 교육의 여러 근본원칙들은 자주 이성과 상반되며 더욱이 때와 장소가 다르면 그 근본원칙들 자체와도 상반되므로, 바로 이 점 때문에 철학자들은 교육을 인정하지 않는다. 141

 

모든 정신작용들을 발원시키고 움직이는 주된 원리는 무엇일까. 고통과 쾌락의 지각이다. 그 두 가지가 인간정신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나 고통과 쾌락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정신에 나타난다. 그 두 가지 방식의 결과들은 서로 확연히 다르다. 즉 첫 번째는 그 지각들은 실제로 느낄 때의 인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도 두 번째로 지금 내가 그 지각을 언급할 때처럼 오직 관념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143

 

자연은 중간을 택하여 모든 선과 악의 관념에 의지를 움직이는 능력을 부여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관념을 이러한 영향에서 완전히 배제하지도 않았다. 근거 없는 허구는 효력이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안다. 우리가 존재하거나 존재하리라고 믿는 대상들의 관념은 감관이나 지각에 직접 현전하는 인상과 동일한 결과를 다소 낮은 정도로 산출한다. 그렇다면 신념의 효력은 단순 관념을 우리의 인상과 대등하게 끌어올리는 것이며, 정념에 이와 유사한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관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신념은 관념을 힘과 생동성에서 인상과 엇비슷하도록 만듦으로써 가질 수 있을 뿐이다. 힘의 서로 다른 정도가 곧 인상과 관념의 근원 적 차이이므로 그 차이는 결과적으로 지각들의 결과가 갖는 차이의 원천이며,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간에 차이가 제거되면 인상과 관념은 모든 새로운 유사성들의 원인을 획득한다. 143

 

인간의 인식을 지식과 개연성으로 나누고 지식을 관념의 비교에서 발생하는 명증성이라고 정의하는 철학자들은, 당연히 원인이나 결 과에서 유래하는 논변들을 모두 개연성이라는 일반 술어로 파악한다. 150

 

첫째, 상반되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큰 개연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개연성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연성이 아니라 확실성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이 가능성과 그것과 대립하는 개연성이 복합된 부분들은 모두 같은 본성을 가지며, 오직 수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셋째, 자연현상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정신현상에서도 어떤 원인이 많은 수의 부분으로 이루어지고, 그 수의 변화에 따라 결과도 증가 하거나 감소할 때는 언제나 정확히 말하자면 결과는 하나의 복합된 결과이며 원인의 각 부분들에서 유래하는 여러 결과들의 합일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분명한 근본원칙으로 확립할 수 있다. 160-161

 

앞서 설명한 가설에 따르면 원인이나 결과로부터의 추론은 모든 종류가 다음 두 요소를 토대로 하고 있다. 하나는 과거의 모든 경험가운데에서 어떤 두 대상의 항상적 결부이고, 다른 하나는 그 대상들 가운데 하나와 현전하는 대상의 유사성이다. 이들 두 요소의 효력 가운데서 하나는 현전하는 대상이 상상력을 북돋워 생생함을 불어넣고, 도 다른 하나는 항상적 합일에 따라 유사성이 관계된 관념에 그 힘과 생동성을 전달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관계된 관념을 믿거나 동의한다고 말한다. 166

 

원인과 결과에 관한 모든 판단은 습관과 경험에서 나온다. 우리가 다른 대상과 합일된 어떤 대상을 보는 데 익숙하다면, 상상력은 자 연적 전이에 의해 그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 가며, 반성은 전이를 막을 수 없다. 습관은 그 본성으로서 익숙한 대상과 정확이 동 일한 어떤 대상이 주어질 때 전력을 다해 작용한다. 분만 아니라 유사한 대상을 발견했을 때도 정도는 낮지만 역시 작용한다. 비록 차 이가 날 때마다 그 힘을 조금씩 잃기는 하지만, 상당한 여건이 동일하게 남아있는 한 신념이 완전히 소멸되는 일은 거의 없다. 170

 

나의 학문 체계에 따르면 모든 (인과적) 추론은 습관의 결과일 뿐이다. 습관은 상상력을 북돋우고 어떤 대상에 관한 생각에 몰두하도록 하는 것 말고는 영향력이 전무하다. 그러므로 판단력과 상상력은 결코 상반될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이 두 기능에 대한 습관의 작용은 결코 두 기능을 대립시킬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72

 

레츠 추기경은 세상에는 사람들이 현혹당하고 싶어하는 것이 많고, 세상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직업과 인격에 상반되는 말을 할 때는 용서하지 않지만 그런 행동을 할 때는 좀더 쉽게 용서한다고 말한다. 말의 흠은 행동의 흠보다 훨씬 숨김없고 뚜렷하다. 행동의 흠은 변명거리를 많이 허용하고 행위자의 의도와 시각에 관해 아주 명석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175

 

 

우리는 습관에 의하여 원인에서 결과로 옮겨 가며, 상관관념에 유포하는 생동성은 어떤 현전하는 인상에서 빌려 온다. 그렇지만 굳은 습관을 낳는 사례들을 충분히 관찰하지 않았을 때, 이 사례들이 상반될 때, 유사성이 정확하지 않을 때, 현전하는 인상이 희미하고 모호할 때, 경험이 기억에서 어느 정도 지워졌을 때, 결부가 대상들의 긴 연쇄에 의존할 때, 일반 규칙에서 유래하는 추정적 결론이 일반 규칙에 적합하지 않을 때 관념의 힘과 강렬함이 감소함에 따라 명증성도 감소한다. 이것이 그 판단과 개연성의 본성이다. 175-176

 

첫째, 이성만으로는 결코 근원적 관념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둘째, 경험과 구별된 이성은 원인 즉 산출적 성질이 모든 존재의 시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 내릴 수 없다. 이 두 고찰은 이미 충분히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나는 그 두 원리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정할 뿐이다. 이성이 효력의 관념을 결코 불러일으킬 수 없다면 그 관념은 경험으로부터 유래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감각 또는 반성이라는 일반적인 통로를 거쳐 정신으로 침투하여 이 효력을 나타내는 개별적 사례들로부터 유래되어야 한다. 관념은 언제나 그 대상 곧 인상을 재현한다. 또 반대로 모든 관념들을 불러일으키려면 어떤 대상이 필요하다. 179

 

대상의 항상적 결부는, 즉 계기와 인접관계의 부단한 유사성은 어떤 대상에서도 새로운 것을 나타내거나 산출할 수 없다. 그러나 필연성, 능력, 효력 등의 관념은 이 유사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이 관념은 언제나 결합되어 있는 대상에 속하거나 또는 속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186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연관은 원인에서 결과를 추정하거나 결과에서 원인을 추정하는 기초이다. 추정의 기초는 대상의 습관적 합일에서 발생하는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의) 전이이다. 그러므로 이 필연적 연관과 습관적 전이는 동일한 것이다. 필연성 관념은 어떤 인상에서 발생한다. 감관으로 전달되는 인상은 이 관념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러므로 필연성의 관념은 어떤 내부 인상이나 반성인상에서 유래해야 한다. 어떤 대상에서 그 대상에 언제나 수반되는 것의 관념으로 옮겨가는 성향은 습관이 산출한다. 그런데 이 성향을 제외하고는 현재 우리의 관심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 내부 인상은 없다. 그러므로 이 성향이 필연성의 본질이다. 요컨대 필연성은 대상이 아니라 정신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187

 

우리는 지금까지의 학설에서 모든 원인은 같은 종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동력인과 필수인을 구별하는 것, 또는 동력인과 형상 인, 질료인, 모형인, 목적인을 때때로 구분하는 것이 전혀 근거 없음을 알 수 있다. 192

 

단 한 종류의 원인이 있듯이 필연성도 한 종류만 있으며, 따라서 도덕적 필연성과 자연적 필연성 사이의 일상적 구별은 사실상 아무 근거가 없다. 192

 

  •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인을
    1) 동력인efficient causes,
    2) 질료인material causes,
    3) 형상인formal causes,
    4) 목적인final causes이라는 네 종 류로 구별했다.

     

  • 스콜라학은 다시 이것들을 세분한다. 필수인causes sine qua non과 모형인exemplary causes이 그것이다.

 

  1. 원인과 결과는 반드시 공간과 시간에 인접해 있다.
    2. 원인은 반드시 결과보다 앞선다.
    3.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반드시 항상적 합일이 있다. 주로 인과관계를 구성하는 성질이다.
    4. 동일한 원인은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낳고, 동일한 결과는 동일한 원인을 제외한 어디에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5. 서로 다른 여러 대상들이 동일한 결과를 낳을 때,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가 그 대상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어떤 성질 때문이다.
    6. 유사한 두 대상의 결과들 사이의 차이는 그 대상들의 서로 다른 차이에서 기인한다.
    7. 어떤 대상이 그 원인의 증감에 따라 함께 증감할 때, 이것은 원인의 서로 다른 여러 부분에서 발생한 서로 다른 여러 결과들의 합일 에서 유래하는 하나의 복합적 결과로 간주해야 한다. 인접한 시간과 장소에서 비슷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비슷한 원인에 잇따르므로, 잠시 동안 그 원인과 결과들이 분리되는 것은 이 원인 들이 완전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196

 

나에게 가장 명증적 진리로 여겨지는 것은 야수들도 인류와 마찬가지로 사유와 이성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198

 

이성은 우리 영혼에 있는 놀랍고도 이해할 수 없는 직감이며, 이 직감은 우리가 일련의 관념들을 따라가게 하고 그 관념들의 개별적 상환과 관계에 따라 그 관념들에게 개별적 성질을 부여한다. 이 직감이 과거의 관찰과 경험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과 관찰이 직감이라는 결과를 낳는 이유에 대해, 자연만이 그런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것 이외의 어떤 궁극적인 이유를 제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버릇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자연이 산출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뿐 아니라 버릇은 자연의 원리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버릇의 힘은 모두 자연이라는 그 기원에서 유래한다. 201

 

진리는 이성이라는 원인의 자연적 결과이다. 그러나 이 결과는 다른 원인의 개입과, 우리의 정신 능력이 불안정한 까닭에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잇다. 이 때문에 모든 절대적 지식은 개연적 지식으로 후퇴한다. 그리고 우리가 오성의 정확성과 기만성을 경험함에 따라서, 또 문제의 단순성과 복잡성에 따라서 이 개연성이 증감된다. 203

 

온갖 개연적 시작에서 대상의 본성에 본래부터 내재하는 제1의 근원적 불확실성 외에 판단 기능이 약한 데서 나오는 제2의 새로운 불확실성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이 두 불확실성들을 함께 조정할 때, 우리는 이성을 통하여 우리 기능들의 정확성과 성실성을 평가하면서 오류 가능성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제3의 의심을 더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 마음에 직접 나타나는 의심이며, 우리가 이성을 철저히 따른다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205

 

최초 신념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것은 그 힘과 활기를 조금씩 감소시키는 새로운 검토를 많이 거치게 되면 반드시 없어지게 된다. 내 판단력의 자연적 오류 가능성을 반성해 볼 때, 추리하는 대상들만을 깊이 생각할 때보다 나의 견해에 대한 신뢰도는 낮아진다. 206

 

신념이 단순한 사고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면, 표상작용이라는 특정 방식 또는 힘이나 활기가 덧붙여지지 않고는 그 신념은 스스로 없어질 수밖에 없고, 모든 경우에 절대적인 판단보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까지의 논증에서 어떤 오류도 발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믿고 사유하며 추리하기를 그치지 않으려고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경험이 충분한 확신을 준다. 따라서 그가 자신 있게 결론을 내릴 수 잇는 것은 그의 추론과 신념은 단순한 관념과 반성만으로는 없애버릴 수 없는 어떤 감각 또는 특정 방식의 표상작용이라는 것이다. 207

 

우리의 감관이 인상을 구별하거나 독립적이고 외부적인 어떤 것의 심상으로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감관은 우리에게 단일 지각만 전달할 뿐이며, 지각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최소한의 암시조차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하나의 지각은 이성이나 상상력의 어떤 추정에서 비롯되지 않고는 이중 존재의 관념이 결코 생겨날 수 없다. 정신이 자신에게 직접 나타난 것 이상을 보려고 할 때 품는 결단은 결코 감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212

 

철학은 우리에게 정신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지각일 뿐이며 단절되어 있고 정신에 의존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지만, 반면에 사람들은 지각과 대상들을 혼동하고, 독립적으로 지속되는 존재를 자신들이 보고 느끼는 바로 그것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감은 전혀 불합리하므로 오성 이외의 다른 어떤 기능에서 유래하는 것이 틀림없다. 216

 

신념의 본질은 표상 작용의 힘과 생동성에 있다. 이 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는 개체 화의 원리, 즉 동일성의 원리를 해명하는 것이고,
둘째는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단절된 지각들의 유사성이 우리를 내세워 그 지각들에 동일성을 귀속시키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며,
셋째는 지속적 존재를 통해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이 현상들을 합일하는 성향은 환각에 서 비롯되는데, 이 성향을 평가하는 것이다.
넷째는 그 성향에서 발생하는 표상 작용의 힘과 생동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222

 

철학자들은 감지할 수 있는 지각들의 독립성과 지속성에 관한 의견은 기각하지만 결코 지속적 존재에 관한 의견을 기각하지는 않는다. 앞의 발상에는 모든 학파가 일치하지만, 뒤의 발상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앞의 발상의 필연적 귀결인데도 불구하고 소수의 급진 회의론자들 특유의 소유물이 되었다. 234

 

원리는 상반되면서도 정신을 통해 동시에 수용되며 서로를 무력화시킬 수 없다. 상상력은 유사한 지각들이 지속적이고 부단한 존재를 가지며, 나타나지 않아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반성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은, 유사한 지각들이라고 해도 그 존재 의 측면에서는 단속적이며,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우리는 반성과 공상 모두의 가설에 적합한 새로운 허구를 통해 이 의견들 사이의 모순을 피할 수 있는데, 이 가설은 상반되는 성질이 서로 다른 존재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즉 단속은 지각들에 그리고 지속은 대상들에 속한다고 본다. 235

 

‘항상성’이 시간 경과에서 동일성 내지 무변화성을 의미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지금부터 이야기할 ‘정합성’은 시간 경과에서 변화의 항 상성의 의미한다. 239.

 

근세 철학의 근본 원리는 색, 소리, 맛, 향기, 뜨거움, 차가움 등에 관한 의견이다. 이것들은 근대 철학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정신적 인 인상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외부 대상들의 성질들과 어떤 유사성도 없이 그 대상들의 작용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249

 

색, 소리, 맛, 향기 등이 단지 지각일 뿐이라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실재적이고 지속적인 독립적 존재를 갖는 것은 전혀 없다. 심지어 주로 역설된 제1성질들인 운동, 연장 그리고 견실성조차 가질 수 없다. 251

 

견실성의 관념이란 최대한의 힘을 가해도 서로 침투할 수 없고, 여전히 분리된 각각의 존재를 유지하는 두 대상들의 관념이다. 251 견실성의 관념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서로 힘을 가하면서도 전혀 침투하지 않는 두 물체를 생각해야 한다. 더욱이 다른 어떤 것을 생 각하지 않고 어떤 대상 하나에만 국한한다면, 이 관념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비실재들은 각자의 장소에서 다른 것들을 서로 밀쳐 낼 수 없다. 비실재들은 어떤 장소도 차지하지 않으며 어떤 성질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252

 

명석하게 표상되는 것은 무엇이든 존재할 수 있으며, 어떤 방식에 따라 명석하게 표상되는 것은 무엇이든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용인된 원리이다. 그리고 또 서로 다른 모든 것들은 구별될 수 있으며, 구별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상상력을 통해 분리될 수 있다. 이것은 또 다른 원리이다. 이 두 원리들로부터 나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 있다. 모든 정신적 지각들은 서로 다르며 우주의 어떤 것과도 다르므로, 정신적 지각들은 독립적이고 분리될 수 없을뿐더러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고 지각들의 존재를 지지해줄 어떤 것도 필요 없다. 그러므로 이 정의가 실체를 설명하는 한, 지각들은 실체이다. 256

 

스피노자의 무신론이 지니는 기본 원리는 우주의 단순성 및 실체의 단일성에 관한 학설이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이 실체에 사유와 물질 모두가 내재한다고 가정했다. 그에 말에 따르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실체만 있다고 한다. 그 실체는 완전히 단순하고 분할될 수 없으며 국지적으로 현전하지 않고 모든 곳에 존재한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 외부적으로 발견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반성을 통 해내부적으로 느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단순하며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변용일 뿐이다. 그것들은 분리 되거나 독립적인 어떤 존재도 갖지 않는다. 263

 

인상들이 갖는, 발견할 수 있는 관계들은 모두 대상들에 공통적이라는 반대 명제가 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경험에서 비롯되는 비규칙적 종류의 추론을 제외한 어떤 원리로도 우리는 인상까지 확장되지 않는 대상들 사이의 연관과 불일치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 264

 

한 대상의 어떤 성질이 인상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 성질을 인상으로 재현할 수도 없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대상에 있는 어떤 성질의 관념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념은 모두 인상에서 유래한다. 그렇다면 변용으로서 연장을 갖는 대상과 그 변용의 실체로서 단순하고 비복합적인 본질 사이의 불일치가, 연장을 갖는 대상의 지각 또는 인상과 비복합적 본질 사이에서 대등하게 발생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그 불일치를 발견할 수 없다. 대상의 성질에 관한 관념은 모두 인상을 거친다. 따라서 연관이든 불일치든 간에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관계는 대상들과 인상들 모두에 대해 공통적이어야 한다. 265

 

어떤 인상이 자아의 관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 인상은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을 통하여 동일함을 지속해야 한다. 자아는 그와 같은 방 식에 따라 존재한다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적이고 변하지 않는 인상은 없다. 고통과 쾌락, 슬픔과 기쁨, 정념과 감각은 잇따라 일어나며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인상들 가운데 어떤 것에서도, 또는 다른 어떤 것에서도 자아의 관념은 유래할 수 없다. 따라서 그와 같은 관념은 없다. 275

 

 

지각없이는 어떤 것도 관찰할 수 없다. 깊은 잠에 빠졌을 때처럼 내 지각들이 한동안 사라진다면, 그동안 만큼은 나 자신을 감지할 수 없다. 따라서 나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죽어서 나의 지각이 모두 없어진다면, 나의 신체가 죽은 뒤 생각할 수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면, 나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나를 완전한 비실재로 만드는 데 무엇이 더 필요한지도 생각할 수도 없다. 276

 

동일성은 유사, 인접 그리고 인과 등과 같은 세 관계들 가운데 어떤 것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세 관계의 실제 본질은 그 관계들이 관념 들의 거침없는 전이를 낳는 데 있다. 앞에서 설명된 원리들에 따르면 당연히 인격의 동일성이라는 우리의 관념도 연관된 관념들의 계열을 따르는 사유의 거침없고 부단한 진행에서 유래한다. 283

 

동일성은 관념의 관계들에 의존하며, 이 관계들이 쉬운 전이를 낳음으로써 동일성을 산출한다. 그러나 관계들 그리고 전이의 수월함 등은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감소될 수 있으므로, 그 관계들이 동일성이라는 이름의 자격을 획득하거나 상실할 때 우리는 시간에 관한 어떤 논쟁을 해결할 수 있는 타당한 기준을 세우지 않는다. 연관된 대상들의 동일성에 관한 모든 논쟁은 단지 언어상의 논쟁에 그친다. 285

 

무릇 경험은 과거 대상들의 여러가지 결부를 나에게 가르치는 원리이다. 습관은 내가 미래에도 동일한 것을 기대하도록 결정하는 또 다른 원리이다. 경험과 습관은 함께 손잡고 상상력에 작용해서 이러한 장점을 수반하지 못한 다른 것들보다 더 강렬하고 생생한 방식으로 내가 어떤 관념을 형성하도록 한다. 289

 

기억, 감관 그리고 오성 등은 모두 상상력 또는 관념들의 생동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289

 

지각들이 독립적 존재들이라면, 그 지각들은 함께 연관됨으로써만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인간 오성이 발견할 수 있는 독립 적 존재들의 연관은 전혀 없다. 우리는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나아가는 사유의 연관이나 결정을 느낄 뿐이다. 따라서 사유만이 인격의 동일성을 발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사유는, 정신을 구성하는 일련의 과거 지각들을 반성해 보고 그 지각들의 관념들 이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또 자연스럽게 서로를 도출하는 것으로 느껴질 때, 이 인격의 동일성을 발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304

 

 

제2편 정념

 

 

정념은 다시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직접 정념은 선악 그리고 고통과 쾌락으로부터 직접 발생하는 것이다. 간접 정념은 같은 원리에서 유래하지만 다른 요소와 결부되어 발생한다. 내가 보는 간접정념이란 긍지, 소심, 야망, 허영심, 사랑, 미움, 질 투, 연민, 심술, 관용 등과 함께 이것들에 의존하는 정서를 포함한 것이다. 그리고 직접 정념에는 욕구, 혐오, 비탄, 기쁨, 희망, 두려움, 절망, 안도 등이 있다. 310

 

정신에 나타나는 첫 번째 관념은 원인, 즉 산출적 원리의 관념이다. 이 관념은 자신과 연관된 정념을 불러일으킨다. 그 정념이 발생했을 때 그것은 다른 어떤 관념으로, 즉 자아의 관념으로 우리의 관심을 전환한다. 여기에 정념을 산출하는 관념과 정념을 통해 상출된 관념 사이에 정념이 자리잡게 된다. 따라서 정념을 산출하는 최초의 관념은 정념의 원인을 표상하고 정념이 산출한 두 번째 관념은 정념의 대상을 표상한다. 313

 

관념들은 유사성과 인접성 그리고 인과성을 통해 연합되지만, 인상은 오직 유사성을 통해 연합된다. 319

 

부가 오직 인상과 관념의 이중 관계를 통해서만 그 소유자에게 긍지와 허영심을 산출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체적인 추리를 쉽게 이끌어 내고 증명할 수 있다. 부의 참된 본질은 삶의 쾌락과 편의성을 창출하는 능력에 있다. 그런데 이 능력의 실제 본질은 그 힘이 실현될 수 있는 개연성에 있다. 즉 참된 추론을 통해서든 거짓된 추론을 통해서든 그 능력은 우리가 쾌락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예 감하도록 하는 원인이다. 쾌락을 이렇게 예감하는 것 자체가 아주 상당한 쾌락이다. 350

 

모든 관념은 인상에서 유래한다. 이 두 종류의 지각은 영혼을 자극하는 힘과 생동성의 정도에서 서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관념과 인 상의 구성 요소는 정확히 일치한다. 인상과 관념의 출현방식과 순서가 일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둘 사이의 힘과 생동성의 정도 차이가 인상과 관념을 구별하는 유일한 차이점이다. 354

 

우리의 생각을 큰 대상과 작은 대상으로 전환시키면, 상상력은 큰 대상에서 작은 대상으로 전이하는 것보다 작은 대상에서 큰 대상으로 전이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지만, 반대로 감정은 이것을 더 어렵게 느낀다. 감정은 상상력보다 강력한 원리이다. 그러므로 감정이 상상력을 지배하고 정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당연하다. 377

 

관념은 결코 완전히 합일될 수 없다. 그러나 관념은 일종의 불가침투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 배척한다. 따라서 혼합이 아니라 결부를 통해서 복합관념을 형성한다. 반면에 인상과 정념은 완전히 합일되기 쉽다. 말하자면 색깔처럼 서로 완전히 섞여서 원래의 상태를 상실하여, 전체에서 발생하는 단일 형태의 인상을 변화시키는 데에만 기여할 수 있다. 인간 정신의 아주 기이한 현상 가운데 몇 가지는 정념의 이런 속성에서 비롯된다. 401

 

긍지와 소심은 영혼의 순수 정서이며, 어떤 욕구도 수반하지 않고 우리의 행동을 직접 유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랑과 미움은 자체로서 완성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이 산출한 정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다른 어떤 것으로 보낸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 하는 사람의 행복에 대한 욕구를 수반하고 불행에 대한 혐오를 수반한다. 미움은 미워하는 사람의 행복에 대한 혐오와 불행에 대한 욕구 따위를 산출한다. 402

 

연민은 인접성에 의존하며, 심지어 그 대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좌우된다. 이런 사실은 연민이 상상력에서 유래된다는 증거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여자와 아이는 상상력을 가장 잘 따르므로 연민의 정을 느끼기 쉽다. 405

 

연민이 사랑의 효과를 모방하듯이 심술은 미움의 결과를 모방한다. 즉 심술은 우리를 모욕하거나 해치지 않는 다른 사람의 괴로움과 불행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의 소감이나 의견이 이성에 지배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사람은 언제나 대상 고유의 중요성이나 가치 따위보다는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비교하여 판단한다. 407

 

우리는 대상을 내재적 가치에 따라 판단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다른 대상과의 비교를 통해 그 대상에 대한 견해를 형성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서 행복이나 불행의 크고 작은 정도를 관찰함에 따라 우리 자신의 행복이나 불행을 평가하고 최종적인 고통이나 쾌락을 느낄 수밖에 없다. 410

 

자비, 즉 사랑에 수반되는 욕망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에 대한 욕구이며, 그 사람의 불행에 대한 혐오이다. 마찬가지로 분노, 즉 미움 에 수반되는 욕망은 미워하는 사람의 불행에 대한 욕구이며 그의 행복에 대한 혐오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행복4에 대한 욕구와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함 혐오는 자비와 유사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한 욕구와 그의 행복에 대한 혐오는 분노에 대응한다. 그런데 연민은 타인의 행복을 욕구하고 그의 불행을 혐오하는 것이며, 심술은 그와 반대의 욕망이다. 417

 

어떤 정념의 특성을 결정하는 것은 현재의 감각 또는 순간적 쾌락이 아니다. 정념이 발생하여 사라질 때까지의 일반적 운동추세나 성향이 결정한다. 이 근본원칙 때문에 고통을 공감하는 것 즉 연민은 사랑을 산출한다. 그리고 이것은 연민이나 공감이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운명과 선악에 흥미를 갖도록 하다. 왜냐하면 이 공감은 일차적 감각에 대응하는 이차적 감각을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차적 감각에서 연민이나 공감은 사랑 및 자비와 동일한 영향력을 갖는다 420

 

 

다른 사람의 좋은 성질은 첫 번째 관점에서는 사랑을 낳고, 두 번째 관점에서는 미움을 낳고, 세 번째 관점에서는 존경을 낳는다. 즉 존경은 사랑과 소심이라는 두 정념의 혼합물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나쁜 성질은 우리가 그 성질을 보는 관점에 따라서 미움이 나 긍지 또는 경멸을 불러 일으킨다. 425

 

이성만으로는 어떤 행동도 유발할 수 없고 어떤 의욕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러므로 추정컨대, 바로 이 이성이라는 직능은 의욕을 막거나 어떤 정념 또는 정서를 선택하려고 논의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 귀결은 필연적이다. 이성은 우리의 정념에 상반된 방향의 충동을 주는 것 이외에는 의욕을 방지할 영향력이 없다. 451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고 또 노예여야만 한다. 바꿔 말해 이성은 정념에게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외에 결코 어떤 직무도 감히 탐낼 수 없다. 452

 

각각의 원인을 통해 두 정념이 이미 산출되어 정신에 나란히 현전할 때, 그 정념 사이에 오직 한 가지 관계만 있거나 때로는 아무 관계도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정념은 쉽게 뒤섞여 합일된다. 지배적인 정념은 열세인 정념을 흡수하고, 한번 고조된 기운은 그 방향 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변화가 우세한 정념에서 유래되었다고 자연스레 상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두 정념 사이의 연 관은 어떤 정념과 무관심 사이의 연관보다 여러 측면에서 긴밀하다. 457

 

 

우리의 정념을 증감시키고 쾌락을 고통으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습관과 반복만큼 중대한 영향력을 갖는 것은 없다. 습관은 정신에 두 가지 근원적 영향을 미친다. 첫 번째는 어떤 행동을 수행하거나 어떤 대상을 표상할 때 수월함을 제공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 행동 이나 대상을 향한 경향이나 의향을 정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460

 

상상력은 우리가 존재하는 공간 및 시간상의 위치를 결코 완전히 잊게 만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정념과 감관 따위를 통해 자신에게 빈번하게 나타나는 공간 및 시간상의 위치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낯설고 멀리 떨어진 대상에 주의를 돌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매 순간마다 현재를 되새겨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제당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우리는 실존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대 상들을 표상할 때, 그 대상들 고유의 순서와 위치 속에서 그 대상들을 파악한다. 466

 

정념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고통과 쾌락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종류의 감정을 산출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어떤 선이나 악이 제시되는 것뿐이다. 고통과 쾌락이 제거되면 곧 이어서 사랑과 미움, 긍지와 소심 그리고 반성적이거나 2차적인 인상들 따위도 대개 제거된다. 477

 

직접 정념은 선과 악, 바꿔 말하자면 고통과 쾌락 이외의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자연적 충동 또는 직감에서도 자주 발생한다. 적을 처 벌하려는 욕구나 친구의 행복을 원하는 욕구뿐만 아니라, 배고픔과 성욕 그 밖의 몇 가지 신체적 욕망도 이런 종류이다. 엄밀히 말해 서 이런 정념은 선과 악을 낳는다. 그러나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선이나 악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478

 

따라서, 서로 다른 정념들이 혼합된 정념에서는 기쁨이나 슬픔의 정념이 우세해진다. 개연성의 본성은 우세한 시각이나 우연 즉 훨씬 자주 발생하는 정념을 한쪽으로 몰아붙이는 것, 또는 흩어진 정념들이 한 가지 정념 즉 우세한 정도의 정념으로 모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상상력의 상반된 시각에 따라 서로 뒤섞인 비탄과 기쁨은 그 정념들이 합일됨으로써 희망과 두려움이라는 정념을 산출 한다. 479

 

진리의 종류는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관념들 자체의 비율을 발견하는 데 있고,
다른 것은 대상에 대한 관념이 그 대상의 실체와 합치 하는 데 있다.
 487

 

제3편 도덕

 

정신은 우리가 지각이라는 명칭에 포함시킬 수 없는 어떤 활동도 일으키지 못한다. 때문에 우리가 도덕적 선악을 구별하는 판단에도 다른 모든 정신작용과 마찬가지로 이 명칭을 적용할 수 있다. 어떤 성격을 칭찬하고, 다른 성격을 비난하는 것은 각기 다른 지각작용 들일 뿐이다. 그런데 지각은 인상과 관념의 두 종류로 나뉜다. 이 구별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낳는데, 도덕에 대한 탐구는 이 의문에서 시작된다. 즉 우리가 덕과 부덕을 구별하고 어떤 행동을 칭찬할 가치가 있다거나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선언할 때, 이 근거는 인상인가 아니면 관념인가 하는 문제이다. 496

 

도덕성은 언제나 실천철학에 포함되므로, 우리는 도덕성이 우리 정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오성의 차분하고 냉정한 판단을 넘어서는 것으로 가정한다. 이것은 일상 경험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우리가 일상 경험을 통해 인지하기로는, 인간은 흔히 의무의 지배를 받으며, 불의라는 생각 때문에 어떤 행동을 단념하고, 책임이라는 생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497

 

 

이성은 참이나 거짓의 발견이다. 그런데 참이나 거짓은 관념들의 실제 관계 또는 실제 존재와 사실과의 일치와 불일치에 달려있다. 때문에 이와 같은 일치와 불일치의 여지가 없는 것은 모두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고, 그러므로 결코 우리 이성의 대상일 수도 없다. 그런데 명백하게 우리의 정념과 의욕 그리고 행동은 이와 같은 일치와 불일치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근원적 사실 내지는 실재이며, 그것 자체로서 완전하고, 그 밖의 다른 정념과 의욕 그리고 행동과의 어떤 연관성도 전혀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념과 의욕 그리고 행동은 참 또는 거짓이라고 선언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이성과 상반되거나 부합될 수도 없다. 498

 

엄밀하고 철학적인 의미에서 이성은 오직 두 가지 방식으로만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즉 이성은 어떤 정념에 어울리는 대 상의 존재를 우리에게 일깨워 줌으로써 해당 정념을 유발하는 때이다. 두 번째로 이성은 어떤 정념을 일으키는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 할 정도로 원인과 결과의 연관을 드러낼 때이다. 499

 

유사, 반대, 성질의 정도와 양이나 수 따위의 비율 등과 같은 관계는 모두 우리의 행동과 정념 그리고 의욕에서와 마찬가지로 물질에 서도 본래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도덕성이 이런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도덕성의 감각이 이런 관계를 발견하는 데 있는 것 도 아니라는 것 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02

 

부덕과 덕은 이성만으로는 발견될 수 없고 관념의 비교만으로도 발견될 수 없으므로, 덕과 부덕이 유발하는 인상이나 소감을 통해서 만 우리는 덕과 부덕의 차이를 확정할 수 잇다. 도덕적 청렴과 타락에 대한 우리의 결정은 분명히 지각이다. 그리고 모든 지각은 인상이거나 관념이므로, 그 결정이 둘 중 하나가 아니라는 점은 그 결정이 그 밖의 것이라는 데 대해 납득할 만한 논변이다. 그러므로 도덕 성은 판단된다기보다는 느껴진다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513

 

도덕적 선악의 느낌은 행위나 성격을 ‘우리 자신의 개별적 이익과 무관하게 일반적으로 고려할 때’ 느껴지는 특수한 쾌락이나 고통이 다. 여기에서 공감을 중심에 둔 흄 윤리학의 특징적인 성격을 볼 수 있다. 518.

 

 

정의는 인위적인 덕이다. 또한 인간의 사회성은 정의의 규칙을 자연적이고 보편적이게 한다. 그러므로 정의의 규칙은 ‘자연법’이다. 인위적이면서 자연적이라는 역설적인 성격이 정의에 주어진다. 528. 주15 사회는 이런 세 가지 폐단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공한다. 즉,
첫 번째로는 개인의 힘을 결합하여 우리의 능력을 증대시킨다.
두 번째로 는 직업의 분화를 통해 우리의 기량은 향상된다.
세 번째로 상호부조를 통해 우리는 운명과 우발적 사고에 거의 노출되지 않는다. 이처럼 추가된 힘과 기량 그리고 안전성을 통해 사회는 유익해진다. 529

 

우리 자신 및 가장 가까운 친구를 위해 자산과 소유물을 획득하고 싶다는 탐욕만이 그칠 줄 모르며, 영속적이고 보편적으로 사회를 직접 파괴한다. 이 탐욕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며, 또 이 탐욕이 전혀 거리낌 없이 작용하고 탐욕 최초의 가장 자연적인 추세를 따를 때 이 탐욕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535

 

인간의 본성은 감정과 오성이라는 두 가지 주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두 부분은 이 인간 본성이 작용하는 모든 경우에 필수 적이다. 따라서 오성의 지도를 받지 않는 감정의 맹목적인 운동이 인간에게서 사회적 자격을 박탈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536

 

정의는 인간의 묵계에서 생겨나고, 이런 묵계는 인간 정신의 어떤 성질들과 외부대상들의 상황이 서로 엮여 일어나는 어떤 폐단을 해소하는 해결방안으로 의도된 것이다. 인간정신의 이런 성질이란 자기중심성과 한정된 관용이다. 또 외부대상들의 상황이란 그 대상들 의 소유자가 쉽게 변한다는 것이며 인간의 필요와 욕구에 비해 대상들이 매우 적다는 것이다. 537

 

오직, 인간의 욕구에 비해 부족한 자연자원과 아울러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한정된 관용에 정의의 기원이 있다. 538

 

우리 자신의 이익에 대한 관심과 공공의 이익에 대한 관심 때문에 우리는 정의의 법칙들을 제정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이런 관심을 유 발하는 것은 관념들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의 인상과 소감이며, 이 인상과 소감이 없다면 우리는 자연 만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전혀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는 점은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다. 따라서 정의감의 기초는 우리의 관념이 아니라 인상이다. 539

 

즉, 이런 정의감을 유발하는 인상은 인간 정신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책략에서, 바꿔 말하면 인간의 묵계에서 발생한다. 우리의 기질 과 여건 따위의 중대한 변화는 정의와 불의를 똑같이 파괴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오직 우리 자신의 이해와 공공의 이해 따위를 변환시킴으로써 영향력을 갖는다. 539

 

정의는 일종의 묵계나 합의를 통해 스스로 확립된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라고 상정되는 이익에 대한 감각을 통해 정의가 확립된다. 그리고 이 경우에 모든 개별적 행동은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행동하리라는 기대 속에 수행된다. 541

 

우리는 사회가 일단 수립된 다음에 소유권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여건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런 종류의 여건 중 아주 중요한 네 가지, 즉 점유취득, 시효, 증식 그리고 상속을 발견했다. 547

 

약속에 대한 책임의 감각 이외에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의향은 자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약속을 지키는 성실은 자연적 덕이 아니며, 앞서 인간의 묵계가 없다면 약속은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다. 563

 

사람들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억제하지 않고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하는 경우에 그 토대는 자기 이해이다. 사람들이 일단 자기 이해에 주목하여 사회의 평화를 지향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보고 쾌감을 느끼며 이와 상반되는 행동을 보고 거북함을 느끼는 경우의 그 토대는 도덕성이다. 인간의 자발적인 묵계와 책략이 첫 번째 이익을 발생시킨다. 따라서 그런 한도 안에서 정의의 법칙도 인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 이익이 일단 확정되어 인정되면 이들 규칙을 준수하는 데에서 자연적으로, 저절로 도덕성의 감각이 나타난다. 비록 도덕성의 감각은 새로운 책략을 통해 증대되며, 다른 사람들의 소유권과 관련해서 자신의 행동을 철저히 규제하는 경우의 명예감과 의무감을 우리에게 주입하는 데에는 정치가들의 공교육과 부모의 사교육이 기여한다는 것도 확실하다 577

 

기본적인 국가조직의 각 부처와 구성원은 반드시 자기 방어의 권리를 가지며, 기존의 자기 영역을 그 밖의 모든 권위가 침해하는 데에 맞서 유지할 권리를 갖는다. 물질이 저항능력을 뺏기면, 물질은 무의미하게 창조되었을 것이다. 저항능력이 없다면 물질은 단 한 부분 도 독립적 존재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고, 물질 전체는 단 하나의 점으로 응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리 침해를 견제할 구제 책 없이 어떤 정부에 권리를 상정하거나 인민이 자기 역할을 모든 침해자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지고의 권력을 인민들이 공유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따위는 그야말로 터무니없다. 607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을 통해 발견했듯이, 인간은 사회 없이 존립할 수 없고, 또 인간의 욕망이 방종하는 한 사회를 유지할 수도 없다. 아주 절박한 이익은 인간의 행동을 즉각 억제하고, 이른바 정의의 법칙이라는 규칙들을 준수할 의무를 인간의 행동에 부과한다. 우리 가 사회의 평화를 지향하는 행동에 찬동하고 사회 평화의 파괴를 지향하는 행동을 비난할 때, 이익에 대한 이 책임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정념과 소감의 필연적 흐름을 통해 의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불러일으킨다. 614

 

정의는 인류의 선과 복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 덕이며, 사실 정의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한 인위적인 창안에 불 과하다. 624

 

우리 자신 또는 친구의 이해와 관련이 없는 사회의 선과 복리는 오직 공감을 통해서만 쾌감을 주므로, 공감이야말로 우리가 모든 인위적 덕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 원천적 도리이다. 624

 

법과 정의의 전반적 체계는 사화에 이득이다. 인간은 이 이득을 감안하여 자신들의 자발적 묵계를 통해 사회를 확립했다. 이런 묵계를 통해 사회가 일단 확립되면, 사회는 자연적으로 도덕에 대한 강한 소감을 수반한다. 이 소감은 오직 우리가 사회의 이해를 공감하는 데에서만 유래된다. 우리는 공공의 선에 대한 경향을 갖는 자연적 덕에 수반되는 가치평가를 달리 해명할 필요가 없다. 626

 

사랑이나 증오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는 욕구를 수반하고,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려는 욕구를 수반한다 637

 

명랑한 기질을 가진 사람은 자연히 명랑한 기질을 가진 사람과 어울리고, 호색한은 호색한과 어울린다. 그러나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또 다른 자부심을 가진 사람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오히려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과 어울리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자 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전 인류는 보편적으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을 비난하거나 책망한다. 어쩌면 자부심은 비교를 통해 다른 사람 의 기분을 거스르는 원인의 자연적 성향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 대해 근거가 부실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이런 비교를 하며, 자신의 자만심을 지지하는 비교 이외의 다른 어떤 방법도 갖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더욱 자연스럽게 이런 결과가 유래될 수밖에 없다. 분별력과 가치를 갖춘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스스로에게 만족한다. 그렇지 만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신체적 역량과 지성에 대해 만족하고 자랑하기 위해 늘 자기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을 찾아야 한다. 643

 

부덕과 덕을 구별하는 것은 당사자의 이득 원리와 다른 사람의 이득 원리, 그리고 당사자의 쾌락 원리와 다른 사람의 쾌락 원리 등 네 가지 원리에서 발생한다. 649

 

가장 확실한 규칙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내가 특정한 사람과 유지하기를 원하지 않는 관계가 전혀 없다면, 그 사람의 성격은 그만 큼 완전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또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거의 부족한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의 성격은 전적으로 완전하다. 이것이야말로 가치와 덕에 대한 궁극적인 기준이다. 654

 

공감은 아주 강력한 인간 본성의 원리이다. 우리가 확신하는 바에 따르면, 공감은 우리가 도덕에 관해 판단할 때와 마찬가지로 외부대상을 주시할 때에도 우리의 심미안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다. 정의, 충성, 순결 그리고 예절의 경우처럼, 공감은 다른 어떠한 원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작용하는 경우에도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찬동의 소감을 낳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 공감의 작용에 필요한 모든 여건은 대부분의 덕에서 발견된다. 덕은 대개 사회의 복리를 향한 경향을 띠거나, 덕을 소유한 인물 의 복리를 향한 경향을 띤다. 667

 

흄의 생애와 사상

 

1776년 4월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낀 흄은 ‘나의 생애’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썼다. 이 무렵 기다리던 두 권의 저서가 출판되었다.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었다. 같은 해 7월 4일 토마스 제퍼슨이 기초한 미국독립선언문이 필라델피아에 서 발표되었다. 8월 25일 오후 4시경 흄은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향년 65세였다. 706

 

흄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홉스가 제기한 근대 사회사상의 근본문제, 즉 ‘개인의 자기보존활동의 총체가 평화로운 사회질서가 되는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할까 하는 문제’에 답하려고 했었다. 707

 

흄에 의하면, 우리가 인간의 지성이 미칠 수 있는 범위와 힘을 알고 추리를 할 때 사용하는 관념의 본성과 그때 작동시키는 작용의 본성을 해명할 수 있다면 이들 학문은 비약적으로 진보할 것이다. 수학, 자연학, 자연종교가 인간에 대한 지식에 이토록 의존하는 것이 면, 인간 본성과 더욱 밀접하게 결부된 논리학, 도덕학, 문예비평, 정치학에서는 한층 더 진보를 기대할 수 있다. 709

 

흄은 인간 본성의 학문에 ‘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호가고한 기초는 경험과 관찰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실험적 방법이 바로 ‘ 경험적 관찰방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부제는, 흄의 연구방법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대상도 명시 하고 있다. 부제에서 말하는 ‘정신상의 문제 moral subjects’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정신상’이라는 말은, ‘도덕적’을 의미하기보다는 좀더 폭넓게 ‘정신적’을 의미한다. 즉 정신을 가진 인간의 다양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710

 

로크는 생득관념의 존재를 부정하고 관념이 경험에 유래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난 후에 관념의 기원으로서 ‘감각sensation’과 ‘內省 reflection’을 들었지만, 흄은 관념의 기원으로서 단 한가지 ‘인상impression’을 든다. 흄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에 나타난 의식 또는 사고의 모든 것이 知覺이다. 이 지각에는 두 종류가 있다. 즉, 인상과 관념idea이다. 인상이란, ‘마음에 처음으로 나타날 때의 감각, 정념, 감동의 모든 것’이고, 관념이란 ‘사고와 추리에 있어서의 세력이 없는 심상’을 말한다. 인상과 관념의 차이는 ‘그것이 마음에 작용하여 사고 혹은 의식이 될 때의 기운force과 생기liveliness정도의 차이’이다. 712

 

흄은 단순 인상과 관념이 모두 유사하다는 것을 주장한 뒤에 인상과 관념은 어느 쪽이 원인이고 어느 쪽이 결과인지를 문제로 삼는다. 그에 의하면 모든 단순 관념은 그것에 대응하여 그것이 정확하게 재현하는 단순 인상에 유래한다. 713

 

새롭게 나타날 때 처음의 활기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서 인상과 관념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와, 처음의 활기를 완전히 잃고 완전한 관념이 되어 있는 경우 전자의 기능은 ‘기억’이라 불리고 후자는 ‘상상’이라 불린다. 기억과 상상의 차이는 기억의 관념 쪽이 상상보다 훨씬 생기가 풍부하고 강하다는 것, 기억에서는 원래 인상과 같은 형태와 같은 순서로 나타나지만, 상상에서는 변형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715

 

모든 단순관념은 상상에 의해서 분리 혹은 결합된다. 만약 상상이 작동하는 경우 몇 개의 보편적인 원리가 없다면 상상 기능의 작용만 큼 설명하기 힘든 것이 없고, 관념은 우연에 의해서만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단순관념이 규칙적으로 복잡 관념이 되기 위해서는 일종의 결합고리, 즉 연합의 원리로서 ‘유사, 접근, 원인과 결과’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715

 

흄에 의하면 모든 종류의 추론은 관념의 비교이고 대상 간의 관계 바로 그것이다. 이 대상 간의 관계는 무한히 다양하지만, 자연적 관 계와 철학적 관계로 구별된다. 자연적 관계란 ‘두 가지 관념을 상상에 의해서 결합시켜서 하나의 관념이 자연히 다른 관념을 이끌어 내도록 하는 성질’을 말하고, 철학적 관계란 ‘상상에서 두 가지의 관념을 임의로 결합시킨다 해도 역시 관념을 비교하는 단서로서 적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특수한 사정’을 말한다. 철학적 관계는 7개의 총괄적 항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즉, 유사, 동일, 시간 및 장소의 관 계, 양 또는 수의 비율, 질의 정도, 반대, 인과성이다. 이 7가지 항목은 흄의 카테고리표라고 간주할 수 있다. 카테고리란 철학에서 아 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술어화된 것으로 가장 근본적인 기본개념을 의미한다. 718

 

7가지 철학적 관계 속에서 관념에게만 의존하고 절대적 지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유사, 반대, 질의 정도, 양 혹은 수의 비율이다. 처음 세 가지 관계는 논증의 영역보다는 직관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718

 

학문의 밑바탕이 되는 네 가지 철학적 관계 즉, 유사, 반대, 질의 정도, 양과 수의 비율을 말한 뒤 관념에 의존하지 않고 관념이 같더라 도 모습을 나타내거나 사라지거나 하는 세 가지 관계, 즉 동일, 시간적 장소적 상태, 인과성을 들었다. 719

 

우리가 인과성에 대해 말할 때, ‘필연적 결합necessary connection’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관계야말로 ‘접근’이나 ‘계기’의 관계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필연적 결합이야 말로 원인 없는 결과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의 추론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기 때문이다. 720

 

인과성의 문제의 해명에서 불가결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자연적 관계로서의 유사, 접근, 인과성의 세 연합원리인 것을 깨닫고 새삼 이 시점에서부터 필연적 결합의 해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722

 

 

데카르트파 사람들은 생득관념의 원리에 의해, 신을 물질에서 볼 수 있는 온갖 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흄에 의하면, 생득관념의 원리가 허위인 이상, 신을 가정한다 해도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모든 관념이 인상에서 유래한다면, 신의 관념도 같은 기원에서 생기는 것이 된다. 그런데 어떠한 인상도 힘과 효력의 인상을 지시하지 않기 때문에 신에게서 그러한 활동의 원리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727

 

원인과 결과를 결합시키는 필연성이란 힘이 아니라 인과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향하는 마음의 규정이고, 원인이 작용하는 장소는 원인의 속이나 신의 속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728

 

인과관계를 접근, 계기, 항상적 연접처럼 사건의 규칙적이고 한결 같은 共在關係에 의해서 정의되고, 게다가 개별적인 원인과 결과의 결합보다 그것들을 사례로 삼은 보편적 규칙성을 중시하며, 거기서 인과적 필연성의 근거를 찾아내는 흄의 입장은 오늘날 ‘인과의 규칙설’이라 불리고 있다. 728

 

상상에 의해서 관념을 결착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성질로는, 유사, 접근, 인과성 이 세 가지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동일성은 세 가지의 관계 중 어느 것이 의존하고 있는 것이 된다. 732

 

모든 지각이 인상과 관념으로 나뉘는 것처럼, 인상은 원초적과 이차적으로 나눌 수 있다. 원초적 인상 또는 감각 인상은 선행하는 지각이 없어도 신체 조직이나 외부기관에 사물이 닿음으로서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차적 인상 또는 반성 인상은 원초적 인상의 어떤 것에서 직접 생기거나, 그 관념이 끼어들어 생기는 것이다. 733

 

인상 사이에도 관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력 또는 연합이 있다. 관념은 유사, 접근, 인과성에 의해 연합되는데, 인상은 유사에 의해서만 연합된다. 737

 

만약 물체 사이에 규칙적 연접이 없다면,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관념을 결코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필연성의 본질이라고 생각 되는 두 가지 사항이 있다. 바로 물체 상호간의 항상적 연접과 마음의 추리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도출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필연성을 승인해야 한다. 이러한 추리를 낳는 것은 연접의 관찰이다. 그러므로 만약 마음의 활동에도 항상적 연접이 있음을 증명하면, 마음의 활동의 필연성을 확립하는 것이 될 것이다. 741

 

흄은 윤리적 이성주의의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고 하고, 그 오류를 밝히기 위해 다음 두 가지 명제를 증명하고자 했다. 1. 이성만으로는 어떠한 의지의 작용에도 절대 동기가 될 수 없다. 2. 의지를 이끌 때, 이성이 정념과 대립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745

 

“우리가 정념과 이성의 싸움에 대하여 말할 때는, 엄밀히 말해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한 그 정도에 불과해야 하고, 이성은 정념을 받들고 복종하는 것 이외에 결코 어떠한 역할을 감히 바랄 수 없다.” 746

 

정념은 인상의 부류에 속하며, 그러므로 원초적 존재이다. 또한 독특한 존재이자 존재의 원초적 변용으로, 다른 정념이나 행위와의 관계를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념은 관념의 관계에 일치하거나 다른 실재를 복사할 수 없으므로, 이성과 대립하거나 싸우기란 불가 능하다. 747

 

만약 덕과 부덕이 논증할 수 있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유사, 반대, 어떤 성질의 정도, 양이나 수의 비율이라는 네 가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모순에 빠지게 되어 그 모순에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런 관계는 비이성적인 것을 비롯하여 생명이 없는 것에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것조차도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불합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본질 은 그 어떤 것과도 관계가 없다는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게 된다. 750

 

 

홉스에 다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자이며,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명보호=자기보존이라고 하는 것이다. 맨더빌(1670-1733)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나 레이덴 대학교의 의학부를 졸업한 뒤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그곳 관습이 마음에 들어 런던에 정착하였다. 1714년 ‘꿀벌의 우화-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각자가 악행에 빠지 면서 전체를 부유하고 강력한 꿀벌에 비유하여, 각자의 사치 탐욕 질투 등의 부덕이 오히려 사회의 번영으로 이어진다고 역설하고 있다. 753

 

정의와 정의롭지 못한 것은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교육과 인간의 묵약(묵계 또는 편의적 약속 convention)으로 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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