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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마리의 고양이가 본 상대성 꼰대

by mubnoos 2021. 1. 26.

 

‘꼰대’라는 단어가 일상생활이나 직장에서 더 주목 받고 사용되는 것 같다. 급변하는 세상의 속도에 '꼰대'는 더 이상 '인싸'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릴 수 있다’라는 ‘상대성’은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상대성'하면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하면 상대성이다. 아인슈타인은 기존에 존재하던 우주관을 완전히 바꿔놓았으며, 의심할 여지없는 천재다. 아인슈타인이라는 천재 이전에는 뉴턴이라는 천재가 있었다. 뉴턴은 만유인력법칙을 통해 ‘물체가 서로 당기는 힘은 질량과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통해 ‘질량과 거리는 관찰자에 의해서 달라진다’고 증명했다. 다시 말해,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우주관을 '파괴'했다.

 

젊은 세대는 늙은 세대의 것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시대가 탄생한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은 파괴를 기반으로 한다. 아인슈타인도 뉴턴의 것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천재라는 수식이 과분할 것이다. ‘새는 알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도 삶의 의미는 파괴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파괴'하는' 혹은 파괴'되는' 것들만 상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파괴라는 단어의 의미가 너무 상대적이라서 '창조적 파괴'라는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첫번째, 아인슈타인의 고양이 ‘타이거’

아인슈타인은 '타이거'에게 말했다.
“여보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알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네”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양자역학과 거리를 두고 홀로 통일장 이론을 연구하다 ‘꼰대’로써 외로이 생을 마감했다. 아인슈타인은 나이가 들며 안정을 가지게 되면서, ‘파괴’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자신은 파괴하지 않고, 타인의 것만 파괴하려고 했다. 꼰대의 본질아닐까. Naver에 의하면, ‘꼰대’는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늙은이나 선생님을 비하하는 은어로서,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잘못됐다고 여기는 늙은 사람을 의미한다.

 

 

두번째, 슈뢰딩거의 ‘죽었으며 동시에 살아 있는 고양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를 중단하면 ‘죽었으며 동시에 살아있는’ 존재가 아닐까? 심지어 우리는 참고, 견디는 행위를 할 때조차 자기자신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인내할 수 없다. 인내가 어려운 이유도 자신을 파괴함을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테슬라는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는 순간, 정전기를 알게되었다.

모닥불이 활활 타오를수록 재가 되는 시간은 더 빠르다. 우리가 교만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꺼지는 모닥불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것을 확인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은 영원한 보편성의 하나일 것이다. 타 들어 가는 물질들도 뉴턴의 ‘질량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파괴하고 결국은 파괴되는 과정인가. 타인을 포용하고, 자신의 등을 쓰다듬는 순간, 파괴되더라도 삶의 정전기를 통해 사라지지 않는 생존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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