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사물들: 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 유령
서문
ㆍ각자의 입장에서 음악을 붙잡아 기록하는 몇몇 사물들이 있었다. 작곡가의 악상을 기록하는 악보, 연주를 기록하는 재생하는 자동 악기, 누군가가 들은 소리 혹은 듣고 싶었던 소리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음반이 바로 그것들이다. 음악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 사물들은 충실한 필기도구이자, 저장고이자, 음악의 존재론적 조건으로 기능했다.
ㆍ음악을 경험하고 음악에 대한 글을 쓰는 시간이 누적될수록 음악의 이 근본적인 속성이 점점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어디에 있는지, 어떤 촉감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추측조차 할 수 없는 데다 형체 없이 어딘가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이 '음악'에 도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상 속의 동물을 떠올리는 기분이었다.
ㆍ이 사물의 조건이 곧 음악의 조건이었다. 수단과 목적은 전도되거나 동일시됐다.
ㆍ아마도 원칙은 이런 것들이었을 것이다.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다. 음악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인간 조건하에서작동한다. 음악은 기계 조건하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음악은 비물질이다. 음악은 사물이 아니다.
ㆍ음악의 본질이 도식화될 수 있는 구조물 같은 것이라면 이는 악보에 적혀 있는 음표들에 내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소위 ‘음 구조’라 부르며 어떤 음악에 학술적으로 접근할 때 분석의 대상(화성, 선율, 리듬 등)으로 삼는 바로 그것. 하지만 여러 질문들이 뒤따른다. 우리가 작품이라고 통칭하는 것이 반드시 그 음 구조에만 그치는 것일까. 소리를 경유하지 않은 그 정보들을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가 음악 작품에 기대하는 것은 과연 기보되어 있는 것들뿐일까. 연주자들은 그 기보되어 있는 것들만을 소리로 실현시키면 그 작품을 온전히 연주하는 것일까. 음악 작품은 그 악보에 숨어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추적은 완료된 것일까.
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
ㆍ악보는 음악의 기록물이자 실현을 위한 지시사항이므로 음악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악보와 음악 사이에는 언제나 낙차가 있다.
ㆍ악보가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례 중 하나는 오늘날 클래식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18~19세기의 유럽 음악이었다.
ㆍ작곡가는 악보를, 연주자는 그 악보에 대한 소리를 생산한다.
ㆍ음악작품은 존재의 모호한 형식을 즐긴다. 그들은 존재론적 돌연변이다.
ㆍ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그 음악 작품이 정말로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증명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보인다. 그 음악 작품이라는 것이 환청인지 환상인지는 모호하다. 어쩌면 연주는 악보에 의지해 원본 없는 무언가를 복원하는 과정, 혹은 악보를 경유해 음악을 창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ㆍ악보는 작곡가와 연주자를 매개하는 중간자이자 음악 작품이라는 유령 같은 대상을 찾아가는 데 꼭 필요한 단서이자 음악을 소환해 내는 일종의 주문서다. 악보는 음악의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는다.
ㆍ18~19세기 유럽 전통의 악보에 기록된 것들은 선택 가능 여부에 따라 크게 둘로 분류된다. 1) 악보에 필수적으로 기록되어야 하는 기호들, 2) 선택적으로 기록된 요소들
ㆍ악보를 바라보는 기보자의 시선과 수행자의 시선은 서로 다르다. 여기에 시차도 덧입혀진다.
ㆍ악보에서 가장 중요한 기호와 연주자가 가장 중요시 수행할 요소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명시된 지시 사항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름다운 연주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무너지는 다섯 개의 선
ㆍ끝없이 부유하는 듯한 에틱 사티의 음악에 규칙적인 박과 강세는 일종의 장애물이다. 사티는 시간 속에서 끝없이 추동하는 소리와 강세의 움직임보다 고요히 정지된 듯한 '가구'와 같은 감각을 전면에 드러내길 바랐다.
ㆍ쇤베르크는 더 근본적인 차원을 건드렸다. 악보에서 가장 중요한 기호였던 '음표'르르 변화시킨 것이다. 오선이 지워지고, 박자표와 마디선이 사라지고, 음표의 견고함이 부정되고, 선형적 구조가 흐트러졌다. 서서히 생겨난 이 작은 균열들은 우리가 음악 작품이라고 막연히 불러 왔던 것에 근본적인 의심을 품게 할 정도로 점점 더 큰 변화를 불러오기 시작했다.
ㆍ음을 정확히 연주하는 것은 음악의 일부일 뿐이다.
ㆍ그래픽 기보로 쓰인 불확정적 음악에서 어떤 작품을 바로 그 작품으로 만들어 주는 요인이 악보에서 사라지자 악보와 연주의 관계는 순식간에 훨씬 느슨해졌다. 동시에 정확히 무엇을 작품이라고 불러야할지 모호해졌다. 연주자의 선택과 상상력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 소리가 결고 만들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듣는 음악에서 읽는 음악으로
ㆍ음악의 정의는 소리로 구성된 시간 예술일 것이다.
ㆍ음악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글과 책을 읽는 행위도 연속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하나의 음악이나 하나의 글을 단편적인 한 프레이즈나 한 단락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전체로 인식한다. 수많은 음 다발, 언어 다발들이 하나의 제목을 가진 어떤 작품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그 감상에 필요한 연속적 시간을 전제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 연주하는 악기의 탄생
ㆍ사람과 피아노 사이에 피아노-플레이어라는 사물이 끼어들자 우리가 ‘연주’라고 생각해 왔던 개념이 점차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연주에는 언제나 사람의 행위가 전제되어 있었고 악기는 인간과 음악적인 관계를 맺는 사물이었다. 피아노-플레이어는 이 연주의 기본 전제들을 서서히 바꾸어 나갔다. 인간은 연주라는 행위에서 한 발짝 멀어졌고, 기계의 움직임도 연주의 영역으로 포섭됐고, 피아노-플레이어를 조작하는 사람은 연주자이자 청취자가 됐다. 인간과 악기가 맺어 왔던 ‘연주’라는 공고한 관계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피아니스트의 유령
ㆍ플레이어-피아노가 당면한 과제는 두 가지였다. 1) 이 악기가 정말로 연주의 자동화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연주하는 악기라면 연주를 재생하기 위해 인간의 노동이나 해석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의 모든 과정을 기계 스스로 해내야 했다. 2) 그러기 위해서는 애초에 롤이 더 많은 것을 기록하고 피아노 자체도 훨씬 많은 데이터를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ㆍ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 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 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낸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ㆍ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기계 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자동 피아노에서는 인간의 손 크기에 적합하게 설계된 옥타브 언저리를 맴돌지 않은 채 그보다 훨씬 멀리 있는 음들도 동시에 누를 수 있었고, 단 한순간도 지치지 않고 영원히 타건을 이어갈 수 있었고, 열 개의 손가락이라는 제한 없이 수많은 음을 동시에 누를 수도 있었고, 인간의 손으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아주 두꺼운 화음의 트릴 같은 불가능한 테크닉도 가능했다.
자동 피아노를 위한 연습곡
ㆍ피아노의 경우 연습곡은 다섯 손가락이 독립적이면서도 민첩하고 고르게 움직이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는다.
ㆍ피아노적인 것과 피아니스트적인 것을 과연 얼마나 분리할 수 있을까, 악기는 사람이 어떤 사물을 음악적으로 사용하는 것이고, 연주는 사물을 음악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을 전제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피아노적인 것과 피아니스트적인 것을 오나전히 분리할 수 없었을지도, 그런 의문을 품을 필요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의 등장은 그런 질문을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
ㆍ자동 피아노는 인간의 신체라는 이 제한 조건에서 벗어나 제약 없는 타건, 쉼 없는 연타, 거대한 음 뭉텅이, 최대한의 속도, 정확한 비율, 그리고 실수 없는 완벽한 재생을 얻어냈다. 이 음악들은 피아니스트, 즉 인간의 것이 아니라 철저히 피아노라는 사물의 음악이었다.
ㆍ피아니스트적 사고를 벗어난 피아노 연습곡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 인간없이 음악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소리를 재생하는 기계
ㆍ녹음 기술은 인간의 청각 기관을 본떠 만들어졌다.
ㆍ우리가 음악에서 기대하는 것은 '소리를 듣는 것'이었을까?
ㆍ음반은 음악이 그 현장을 떠나게 했지만 대신 다른 시공을 얻었다.
ㆍ근본적으로 음반은 음악의 고정된 형태로 반복해서 들려줄 수 있는 탓에 가능한 한 완벽한 상태를 지향한다.
ㆍ단연 중요한 것은 음반 매체의 노이즈 제거였다. 음반 제작에서 노이즈 제거는 무엇이 음악적이고 무엇이 음악적이지 않은 소리인지를 끊임없이 세세하게 걸러 내는 가치 판단의 현장이었다.
ㆍ레코딩은 존재하는 실재를 재생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재생산이라는 미명 아래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것에 가깝다. 그것이 작동하는 원칙은 사실주의라기보다는 초현실적인 것이다.
ㆍ실황과 음반이 원본과 사본의 관계라면 둘 중 원본은 무엇인가?
ㆍ결국 녹음 현장에서 벌어진 사건은 실황이 궁극적으로 추구해 왔던 사건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음악가들은 마이크 앞에서 더 극적인 비브라토를 해 대거나 개량된 악기를 쓰는 등 무대에서와는 달리 녹음에 적합한 방식을 취했다. 음반이 모든 노이즈를 걷어 내며 끝끝내 충실하고자 했던 그 원본의 실체는 실황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녹음 현장은 때로 실황을 재구성했다. 음반은 실황의 사본이 아니라 누군가 녹음으로서 이상적이라고 여긴 가상의 음악에 가까웠다.
ㆍ조각의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면 음악이 존재하는 형태는 지금과는 한층 달라졌을 것이다. 음악의 원본 형태는 시간 위에서의 경험이 아니라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사물에 가까웠을 것이고, 그 사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악보인 동시에 연주하는 악기이자 소리의 정보들이 물화되어 현현한 것이나 다름없었을 테다. 그렇다면 어쩌면 음악이 지금처럼 시간과 경험에 잠재된 것이 아니라 사물과 공간에 잠재된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음악의 시간성보다 공간성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을지도, 음악은 음각되는 것으로 통용됐을지도, 음각된 모든 사물은 음악의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예술 형식으로서 음반
ㆍ철저히 음반의 것, 정확히는 음반이 지녔던 기록과 재생이라는 두 기능 중에서도 재생의 것이다. 기록은 음반 바깥의 음악에 귀속된다고도 할 수 있지만, 재생은 철저히 음반이라는 사물에 귀속된다.
소리의 오브제, 구체 음악
ㆍ구체 음악은 세계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음악의 재료로 포용했다. 이는 그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규정하겠다는 태도보다는 우리가 그것을 음악의 재료로 들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에 가까웠다. 즉, 구체 음악이 추동한 것은 “듣기의 기술”이었다. 다만 음악에는 신체가 없는 탓에 세계 속을 떠도는 특정한 소리를 흘려보내지 않고 일종의 오브제처럼 대상화하여 자세히 듣기 위해서는 녹음 기술이 필요했지만, 지난한 창작 과정과 고민을 거친 구체 음악이 정말로 조율한 것은 단순히 음악과 구체 음악의 비좁은 관계가 아니라 세계의 소리와 음악의 관계, 그리고 소리를 음악적으로 듣는 새로운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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