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장례식이 유난히 많다. 이번주만 해도 벌써 2건이다. 아무리 코로나가 4단계더라도 꼭 가야만 하는 장례식들은 있다. 이런 불가피한 참여는 '불편함과 책임감에 대한 무력함의 태도'의 표현인 것 같다. 각각의 장례식이 비록 예전보다 허전하고 공허하더라도 죽음은 계속된다. 생각해보니 아버지를 포함한 다수의 지인들이 무더운 여름에 돌아가셨다. 실제로 무더위에는 노인들의 체온조절이 문제로 인해 사망률이 두배는 높다고 한다. 아마도 지구의 에너지는 생명의 엔트로피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불편함과 책임감, 두 가지를 의미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를 연결하는 행동에서 비롯될 것이다. 죽음 혹은 확대된 죽음 즉, 멸망에 대한 반응이, 장례식에서의 그것, 무력감에 태도가 아닌 실제적인 행동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어려운 문제다. 그것들을 알고 대비할 수 있다면 장례식에 가지 않아도 될까? 작가가 표현한, 존재위험을 대비한 인류의 위대한 전략의 일부인 나의 삶은 여전히 무력한 면이 있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만약 이게 사실이 아니라면 세상의 모든 철학자들은 모두 쓸모없는 존재다. / 결국 인류도 멸망할 것이다. 단지 시간의 문제이다. 만약 이것도 사실이 아니라면 세상의 모든 과학자들도 쓸모없는 존재일 것이다. / 사실 그보다 더 어이없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언제인지,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지구상에 출현한 생물종 중 99.9%가 멸종했다. 인간을 포함한 0.1%의 살아남은 생물 또한 아직 멸종하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다. 생물이 아무리 환경에 적응을 잘 했다고 하더라도 생존이나 멸종과는 관계가 없다. 운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멸종이라는 사건은 운에 달려있다.
예전에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내가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자연은 두려움 그 자체였고, 냉담했으며, 숨막힐정도로 고요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을 어머니 대지라고 말하지만 어머니 대지는 자연이 벌이는 무참한 학살 쇼의 무대이기도 하다. 지구를 사랑하자 같은 구호를 외쳐 대지만 생물의 처지에서 본다면 지구가 과연 생물에게 호의적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적대적인 환경에 처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1) 열악한 환경에서 탈출하여 살 만한 곳을 찾거나
2)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거나
3) 멸종하는 수밖에 없다.ㅡ
인류의 멸망은 적어도 현재의 형태의 인간에게는 불가피하다. 같은 행동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짓이다. 우리는 1) 살 만한 새로운 곳으로 탈출하거나 2) 새로운 무언가로 진화하거나 하지 않으면 3) 진화의 막다른 골목이 될 것이다. 우리는 1) 가상세계나 우주로 탈출하거나, 2) Bio-tech를 통해 우리를 적응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거나 하지 않으면 3) 멸종하는 수 밖에 없다.
후쿠오카 신이치에 의하면 생물은 1) 자기 복제를 하고, 2) 동적평형을 이루며, 3) 시간개념을 가지고 있다. 3가지의 생물의 조건만 유지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들만을 배제하고서라도 다른 방법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시에라리온에서 살면서 깨달은 또 다른 것이 있다. 존재하기 어려우면, 의미나 가치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삶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삶 그 자체에 있다.
mubn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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