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아지는 살들
5월의 어느 저녁, 밤 12시까지 돌아오겠다는 맏딸을 기다리며 썰렁한 집안의 응접실 소파에 세 사람이 앉아 있다. 은행에서 은퇴한 반 백치의 귀먼 아버지와 효성스러운 며느리 정애, 그리고 막내딸인 스물 아홉살 노처녀 영희가 그들이다. 어디선가 ‘꽝당꽝당’ 쇠두드리는 소리가 신경을 자극하며 간헐적으로 이어진다. 막내딸은 억지로 지껄이고 있고, 2층 구석방에서 기숙하며 영희와 약혼할 사이로 묵인된 선재는 아직 귀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맏딸은 이북에 있다. 돌아올수 없는 줄 알면서 매일 기다리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2년 전부터 귀가 멀고 반 백치가 되어가는 아버지의 고집 때문이다. 아버지는 형식상 가장일 뿐 날이 갈수록 식모의 행동은 뻔뻔해지고 집안의 통제력은 무너지고 있다.
파자마 차림으로 2층에서 내려온 아들은 도통 입을 열지 않고 서성댄다. 10시가 되자 술로 엉망이 된 선재가 밖에서 영희를 찾는다는 것을 식모가 알린다. 이상한 흥분을 느끼며 선재를 부축하여 그의 방에 들어간 영희는 취한 그를 상대로 정사를 벌이고 나온다. 방을 나온 영희는 오빠의 방으로 들어가 자기가 지금 결혼했다고 알린다. 아무 말도 못하는 오빠의 방을 나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뒤따라 나온 오빠의 말을 가로막는다. 마침내 12시를 알리는 벽시계 소리에 순간 세 사람은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리지만 노인은 어리둥절해 할 뿐이다. 그때 복도로 통하는 문으로 누군가가 나오는데 식모가 히히히 웃으며 변소에 갔다왔다고 말한다. 순간 영희는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키며 적의에 타오르는 눈길로 식모를 가리키며 언니가 왔다고 소리친다. 쇳소리는 그 순간도 이어진다.
5월의 어느 날 저녁부터 밤 12시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둔탁한 쇠붙이 소리가 작품 전체에 무겁고 불길한 분위기를 더해 준다. 또 암시적인 수법과 곳곳에 자리잡은 복선의 설정으로 독자들이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한층 어렵게 하고 있다. 이 소설은 매일 밤 돌아올 리 만무한 맏딸을 기다리며 가족이 치르는 의식을 통해 남북분단으로 인한 실향민의 고통과 대화가 단절된 현대인의 소외를 다루고 있다.
탈향
6·25 전쟁 중에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대규모 1·4 후퇴 당시, 엉겁결에 LST에 올라 한 마을에서 함께 월남한 광석과 두찬, 하원 그리고 나는 부산에서 궁핍한 피란살이를 시작한다. 이들은 부산 부두 하역장에서 노동을 하며 간신히 끼니를 이어가는 생활을 한다. 이들에게는 기거할 방이 없기 때문에 정차되어 있는 화차(火車)에 숨어들어 잠깐씩 잠을 청한다. 이들의 생활은 이처럼 극도로 어렵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 이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겨 내기를 맹세한다.
그러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나이가 많은 두찬과 광석은 나와 하원을 귀찮게 생각한다. 하원은 입만 열면 고향 이야기이고, 눈물을 흘린다. 급기야 광석이 화차에서 실족하여 죽는 사건을 계기로 이들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이들 세 사람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점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마침내 두찬은 광석이 죽은 후 이들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이젠 나 역시 하원을 버리고 타향인 부산에서 실향이 아닌 탈향을 통해 삶의 뿌리를 내리고자 한다.
타령
흐르는 북
평생을 북을 치며 방랑하다가 아들 집에 얹혀사는 민 노인(민익태)과 그에게 상처받고 고학으로 입신한 아들 사이에는 오랜 단절로 인해 회복하기 힘든 갈등이 자리한다. 이 갈등 구조에 대학생인 손자(성규)가 등장해 할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화해시키려 노력한다. 민 노인의 아들은 자신의 사회적 체면 때문에 민 노인이 북에 접근하는 것을 만류한다. 가족들 중에서 민 노인의 예술적 기질과 삶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오직 성규뿐이다.
어느 날, 성규는 할아버지에게 자기 학교의 봉산탈춤 공연에 참여해 달라는 제의를 한다. 고민 끝에 민 노인은 이를 승낙한다. 공연 당일, 민 노인은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잃었던 예술혼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러나 아들 내외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민 노인을 탓하고 성규를 호되게 꾸짖는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성규는 데모를 하다가 붙잡혀간다. 손녀 수경이와 함께 집에 남게 된 민 노인은 '아무래도 그 녀석이 내 역마살을 닮은 것 같아. 역마살과 데모는 어떻게 다를까.' 하고 생각하면서 손녀의 물음에도 아랑곳없이 둥둥둥 더 크게 북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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