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상처 받음에 대하여
ㆍ우리가 왜 고통 받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1장. 상처 주는 세상, 부서지기 쉬운 삶
ㆍ쥐는 물리적 고통을 느낄 수 있지만, 침팬지나 인간처럼 당황하지는 않는다. 실망할 수도 없다.
ㆍ실천은 어떤 규칙적인 행동 방식을 갖는다는 의미다. 그런 실천에서 한 사람이 일을 해결해가는 행동 방식은 명시적인 규칙이나 암묵적인 규범에 의해 좌우된다. 게다가 그런 규칙과 규범을은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일부다.
ㆍ실천의 규칙과 규범은 고정적이지 않으며 대개는 제한적이지도 않다. 실천은 발전하고 변화하며 그와 더불어 실천의 규칙과 규범도 그렇다. 이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때로 실천의 규칙이나 규범은 도전을 받는다.
ㆍ우리의 자아의식은 우리의 과제와 관련이 있으며, 과제는 우리가 몰두하고 있는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삶을 사는 방식을 대체적으로 보았으므로 이제 고통에 노출되는 방식의 문제를 직시해볼 수 있을 것이다.
ㆍ상처에 취약함의 근원은 단지 과제의 문제만이 아니라 도덕적 운의 문제다.
ㆍ우리의 신체는 본질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의 신체적 본질은 우리를 고통에 노출되게 하ㄴ는 근원이다.
ㆍ고통의 일부 형태는 우리가 신체적 대상으로서 몸으로 인지하는 것에서 일어나며, 다른 고통의 형태는 정신적 상태로 인지하는 것에서 일어난다.
ㆍ고통의 또 다른 근원이 있다. 그것은 과제들 사이의 갈등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에 대한 전반적인 헌신, 즉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에서 나온다.
ㆍ진정한 소시오패스는 도덕성에 대한 고려나 타인의 삶에 대한 공감이 없는 사람이다.
ㆍ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2장. 과거의 무게와 미래의 무게
ㆍ후회스러운 삶의 끝에 비통함이 자리하듯이, 항상 그렇지는 않겠지만 좋은 삶의 끝에도 흔히 어떤 슬픔이 자리한다.
ㆍ아무리 운이 좋은 삶이라도 실제로는 고통을 만들어내지 않더라도, 고통의 근원으로서 과거의 무게와 다가오는 죽음의 무게를 피할 수는 없다.
ㆍ더 많은 의미 있음을 갖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상승 궤적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체로 상승 궤적이 있는 삶을 사는 사람조차 의심과 불확실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궤적의 형태에서 어느 지점에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ㆍ존재하는 모든 것은 현재이므로 과거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ㆍ철학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목적은 죽어감과 죽음을 연습하는 데 있다.
ㆍ죽음은 여기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순전한 사실이다. 이 순전한 사실은 두 가지 면을 갖고 있다. 첫째,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의 어려움이다. 우리의 정신은 우리 자신의 비존재를 이해하는 것에 저항한다. 둘째, 우리가 죽으면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ㆍ유한한 인간들 사이에서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음과 위태로움이라는 가치를 갖는다. - 호메로스, <죽지 않는 사람>
ㆍ삶의 의미를 갖기 위해선느 우리는 죽어야 한다.
ㆍ삶의 의이 있음이 바로 죽음을 그토록 두렵게 만든다.
3장.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
ㆍ당신의 삶의 상황은 골칫거리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순간에 어떤 문제라도 있는지 찾아보라. 내일이나 10분 뒤가 아니라 지금이다. 지금 문제가 있는가?
ㆍ거짓된 자아는 과제의 성공이나 실패를 걱정하는 반면, 참된 자아는 그저 이 순간 과제 자체에 몰두할 뿐이다.
ㆍ불교의 핵심은 사성제다.
1) 모든 삶은 불가피하게 괴로움을 지니고 있다.
2)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이다.
3) 괴로움은 갈애를 완전히 소멸함으로써 중단될 수 있다.
4) 이는 주의 깊게 단련된 행동 과정에 의해서 가능하며 승려가 이끄는 집중과 명상의 삶 속에서 정점에 달할 수 있다.
ㆍ불교의 시각에서 만물은 변화한다. 소멸하며 다시 다른 무언가가 되어간다. 우주에 영속성은 없으며 오직 영속성의 외관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눈에는 세계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실체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고정된 채로 남겨두지 않는 변화의 과정뿐이다.
ㆍ삶의 괴로움은 우주가 하나의 변화의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실제로는 그저 이 과정의 한순간에 불과한 것들에 집착함에서 생겨난다.
ㆍ어떻게 열반에 이를 수 있을까? 팔정도는 무엇인가?
1) 바른 견해
2) 바른 생각
3) 바른 말
4) 바른 행동
5) 바른 생활
6) 바른 노력
7) 바른 마음가짐
8) 바른 집중
ㆍ도교는 불교보다 더 평온하고 덜 도덕적이다.
ㆍ기뻐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ㆍ합리성은 신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답은 합리적어어야 한다.
ㆍ우주는 우리가 해낼 수 없는 과업을 우리 앞에 놓아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주는 우리의 한계 이상으로 우리를 밀어붙이지도 않으며, 적어도 그럴 필요가 없다. 좋은 삶은 우리 모두에게 가능하다. 문제는 어떻게 사는가이다. 이 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즉 나는 무엇을 통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좋은 삶이 우리 모두에게 가능하다면, 좋은 삶을 이루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ㆍ스토아주의의 기본적인 목표는 세상에 대한 반응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면서 그 반응을 통제하는 것이다.
ㆍ우주를 유지하는 것은 변화다. 우주는 합리적이지만 굳어 있는 단일 조직이 아니다.
ㆍ현재 순간만이 인간이 살 수 있는 전부이다. - 아우렐리우스
ㆍ에피쿠로스에게 모든 쾌락은 좋은 것이고, 그만큼 즐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모든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ㆍ욕망의 일부는 자연적이고, 일부는 근거가 없으며, 자연적 욕망에는 필연적인 것과 단순히 자연적인 것이 있다. 그리고 필연적인 욕망에는 행복을 위해 필연적인 것이 있고 육체를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 삶 자체를 위한 것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ㆍ우리는 필연적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본성을 따른다.
ㆍ삶은 지금이다. 삶이 지금이 아니었던 적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ㆍ생각에 집중한다는 것은 그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갖고 있는 생각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 생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순간에 갖고 있는 생각으로 보는 것이다.
ㆍ고통을 끝내는 것이 목표라면 어째서 그냥 자살하지 않는가? 답은, 자실은 욕망이나 집착을 극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에 굴복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그 원인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에 제압당하게 함으로써 고통을 끝내는 것이다.
ㆍ상처 받지 않음을 거부하는 이유
1. 우리의 세계가 부정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2. 죽음은 필멸성이라는 사실에 편안함을 가지라고 조언
3. 중요한 과제의 실패와 관련
ㆍ우리가 바꿀 수 없는 어떤 것에 감정을 쏟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4장. 세상은 위험하고, 우리는 위태롭다
ㆍ인간의 노력이 빚어낸 가장 최고의 것조차 비극을 기반으로 한다는 인식을 지닌 채 우리는 나아간다.
ㆍ현재를 긍정하기 위해 과거를 통째로 긍정해야 할까?
ㆍ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긍정이라기보다는 받아들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받아들임 속에서 나는 내 존재와 현재 삶에서의 운 좋은 지위가 수많은 참상을 겪은 역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5장. 상처와 고통의 의미
ㆍ오래된 진리는 난해하지 않다. 오히려 대개 극도로 단순하다. 흔히 진부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이 진리를 살아내야 하고 끊임없이 재경험해야 한다.
ㆍ초연한 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권하는 실천은 고토의 극복에 전념하는 것이다.
ㆍ'행복한 가정은 모두 서로 닮아 있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 <안나 카레리나>, 톨스토이
ㆍ이것들은 작은 문제이다. 화낼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히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상처 받음의 지혜는 작은 문제와 큰 문제의 차이를 아는 데 있다.
ㆍ대부분의 사람에게 돌봄이란, 집착을 포함하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고통으로 상처 받기 쉽다.
ㆍ혼란이 있으므로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과제에 관심을 쏟는 것은 삶이 의미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다. 삶의 과제는 단순히 의미 있는 삶을 살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가 과제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삶이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는 삶에 의미를, 의미감을 주리라는 희망에서 과제, 특히 중심 과제에 착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와 과제 사이의 너무 먼 관계를 암시한다. 대신 우리가 관심을 갖는 특정한 것, 존재하거나 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 그리고 이런 것으로 존재하거나 행하는 결과로서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면 결핍되었을 의미 있음을 나타내게 된다.
ㆍ행복을 직접적으로 추구할 수 없다. 오히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이 부산물로 생긴다. 행복과 불행은 무엇을 하고 싶어 하고, 하고 싶어하지 않는지에 대한 척도가 될 수 있다. 의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삶에 의미를 주기 때문에 과제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제에 관심을 갖고 있고, 그것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착수한다. 우리에게 의미는 관여의 이유가 아니라 관여의 산물이다.
ㆍ받아들임의 공통점
1. 우리의 통제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 있다는 인식
2.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으며, 특히 유감스러운 방식으로 중요할 수 있다.
3.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평온함이나 긍정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대한 슬픔을 갖고 행동하거나 반응한다.
4. 우리는 통제 부족을 인식하지 않았다면, 큰 문제에 대한 통제 부족에 슬픔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ㆍ우리는 세상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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