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반론 - 일하지 않을 권리
그냥 먹고 살자는 건데, 그게 뭐 이렇게 계속 힘든지 믿을 수가 없네.
ㆍ일 자체가 가지는 윤리적 지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ㆍGDP는 더 이상 행복과 안전, 진보를 이루는 데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ㆍ물질이 풍부한 시대에 생산 및 소비의 꾸준한 팽창을 향한 자본주의의 집착과 좋은 삶에 대한 열망 사이에는 곤란한 간극이 나타난다.
ㆍ현재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을 띠며 일상 속에서 당연한 요소로 존재한다. 일은 교리적인 속성을 갖는다. 이는 일이 아무리 곤란한 상황에 처해도 기이할 만큼 그 윤리적 지위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날 노동시장이 자기를 표현하고 창조성을 발휘할 일자리를 제공하는 데 처참히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 모두는 교사나 부모가 자라서 무엇이 되기 원하느냐고 질문하던 때부터 인정받을 만한 일자리라는 것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자랐다. 하지만 그런 우리 중 대다수는 지루함, 얽매임, 소진되는 느낌으로 점철된 유급 고용의 세계에서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노동시장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일이 갖는 윤리적 지위가 별로 흔들리지 않는 현실은 당황스럽다. 대량 실업, 일자리 부족, 저임금 노동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고용은 더 이상 소득과 권리, 소속감을 얻는 원천이 되지 못한다. 이에 대해 정치가 기존에 내놓던 해법이란 '직업 개발', 즉 성과를 확대하고 경제를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시켜 일을 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분야와 관련 있는 과학자, 경제학자들이 지적하듯 지속적인 성장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환경과 사회에 부정적 영향마저 끼친다. 마지막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점점 커지는 일의 지배력에 우리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익숙해져있는지 생각해보면 일이 갖는 교리적 지위가 드러난다. 이제 일은 개인의 집안까지 발을 들이밀면서 이전에 결코 겪거나 참아낸 적 없는 수준까지 우리의 감정과 개성을 장악하려 하고 있다.
ㆍ나는 수준 낮은 일자리, 사회 불안정, 일상을 점점 파고드는 일의 지배력 같은 긴급한 의제가 산재한데도 주류 정치가 내놓는 미래상에서 일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가 해체되지 않는 현실이 염려스러워 이 책을 썼다. 폭풍이 몰아치려는 데도 일 교리는 여전히 요새에 안전하게 웅크리고 있다. 우리는 현재 일 중심 사회가 당연시하는 현실의 단면을 살펴보고,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일에만 매달리던 기존 관습과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보다 공정하며 해방적인 방식으로 일과 자유시간을 나눌 방안을 서둘러 고안해야 한다.
ㆍ다운시프트 생활인 : 고소득이나 빠른 승진보다는 비록 저소득일지라도 여유 있는 직장생활을 즐기면서 삶의 만족을 찾으려는 사람들
ㆍ발달한 산업사회는 어떤 사회적 변화든 억제할 능력이 있지만, 이를 깨뜨릴 힘과 경향성도 동시에 갖고 있다. - 허버트 마르쿠제
ㆍ자유는 불가능하면서도 가능한 것이다.
ㆍ작업장을 구성하고 통제하는 최신 기술에 시달리면서 사회적 효용이 뚜렷하지 않은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에겐 일이란 지루함, 무의미함, 피로에 맞서는 투쟁일 때가 많다. 노동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자신이 지금 하는 일보다는 더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되뇌거나, 머릿속으로나마 상사나 고객에게 저항하는 상상을 하거나, 냉소주의의 껍질 속으로 숨어버리는 등 다양한 개인적 전술을 활용한다. 업무가 끝난 뒤에는 일을 잊으려고 공들여서 탈출구나 보상기제를 만들어내곤 한다.
ㆍ일이란 외부에서 자신의 삶에 가하는 강압이다.
ㆍ직업은 사람의 영혼을 담을 만큼 큰 그릇이 못 된다.
ㆍ사회가 일자리를 계속 더 많이 만들어야 할 만큼 일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가? 생산성이 극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도 여전히 모두가 평생 일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뭘까? 일은 과연 무엇인가? 만약 더 이상 평생 일하며 살라는 강요를 당하지 않는다면 그밖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이 질문을 던지려면 흔히 자연스러우며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진실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ㆍ일은 무엇보다도 사회가 소득을 분배하는 주요 기제다. 따라서 일은 의식주 같은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핵심 통로일 뿐 아니라 현대 소비사회가 제공하는 상업적 유희이자 도피처다.
ㆍ부유한 사회에서 일은 타인이 사는 모습을 따르기 위해서 가장 일반적이고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ㆍ사회가 저마다 성공을 측정할 방법을 갖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부유한 나라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일을 통하는 것이다. 낯선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는 주로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서 출반한다. 부유한 사회에서 일은 어떤 정체성이 적절한지 판단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일은 개인 성장과 성취 도구로서 가치를 부여받고, 사회적 인정과 존경을 얻는 수단으로 확립된다.
ㆍ<창세기>에 보면, 일하는 삶은 신이 아담과 이브에게 내린 벌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일은 천한 밑바닥 활동을 뜻했다. 일은 필수성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천시 받았으며,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강요당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은 노예가 떠맡았다.
ㆍ"고된 노동으로 가득찬 일생을 보내도록 저주받으며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운명의 일격이며, 그 운명은 죽음보다 더 나쁘다. 인간을 길들인 동물 같은 존재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 한나 아렌트
ㆍ"자본주의 발전 과정에는 양심에 따라 경제적 착취에 응할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자본주의가 실권을 장악한 지금은 초월적 형벌 없이도 노동을 강요할 수 있다" 베버가 주장하는 핵심은 일을 갖는 도덕성이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장착되었다는 점이다. 일 윤리는 이미 죽어버린 종교적 믿음의 유령처럼 우리 삶 속을 배회한다.
ㆍ현대 소비문화는 상업적 오락에 쓸 돈을 버는 데 시간과 노력을 더 많이 들이도록 강제하기 때문에 일 규율과 완벽히 맞아떨어진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방탕과 도피는 문화적 금기가 아니라 오히려 집요하게 장려하는 덕목이다. 하지만 그 즐거움을 누리려면 일에 더 강하게 매달려야 한다는 게 문제다. 이런 면에서 대량 소비는 일윤리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증폭시키면서 사회가 주는 최고의 오락으로서, 골치 아픈 현실 속 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종교로서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ㆍ규율화된 생산적 노동 활도이 지극히 비합리적인 종교 윤리에서 기원했다.
ㆍ자본주의 역사는 개인이 노동일에 따르는 희생과 서서히 결합해온 역사다. 이것은 순조로운 과정이 아니라 노동자가 가진 습관을 혹독하게 재구축하는 투쟁이었다.
ㆍ이 책이 궁극적으로 다루는 질문은 하나다. 모두가 적게 일하고, 스스로 자율적 자기계발에 쓸 시간이 더 많은 미래가 과연 올까?
ㆍ사회 비평가로서 고르가 지닌 최고 장점은 일을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고수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그토록 엄청난 생산성 도약을 이루어냈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이토록 열심히 일하는가? 고르는 수많은 저서를 통해 시간을 둘러싼 정치에 관한 비판적 논의를 여는 것으로 이 질문에 대응했다. 모든 사람이 고된 노동에 들이는 시간을 줄이고 스스로 선택한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쓰도록 해 결국에는 경제적 영역을 실제 필요에 종속시키는 정치적 개입이 힘을 얻기 바랐다. 고르는 이런 개입 없이는 더 심각한 파국을 맞을 거라고 믿었다.
ㆍ노동자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실업이 두렵다는 이유만으로 일하는 19세기 초 가공 공장과 생산 공장은 진정한 무덤이라 헀다. 일은 여가시간조차 엉망으로 만드는 피로감을 감당하면서, 필수재를 얻으려 지겹도록 수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ㆍ케인스는 생산기술 진보에 따라 노동시간이 줄어 인구 전체가 더 적게 일할 거라며, 2030년이면 주 15시간까지 줄어들 것이라 예측했다.
ㆍ자본주의 생산성 향상으로 확보한 자유시간을 인도적이고 사회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데 쓰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생산성이 높아지면 필수노동의 총량은 줄어들 수 있어도, 그 결과로 얻는 시간의 해방이 저절로 모두를 위한 해방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앙드레 고르
ㆍ인간은 일을 통해 의도적으로 자연계를 개조해 삶이 지닌 가능성을 확장하기도 한다. 인간은 언제나 자연을 재가공하고, 그로부터 새롭고 수준 높은 성취를 이룰 권능을 얻는다. 마르크스는 이처럼 자기실현이라는 도덕적 이상을 근거로 자본주의 체계에 사로잡힌 일을 비판했다. <자본론>에서는 산업 형태를 띤 일이 노동자를 파편화된 인간으로 망가뜨리고 기계를 구성하는 부속품으로 전락시켜, 생산적 역량의 활용을 통한 인간의 성취 가능성을 억눌렀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일이 더 이상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창조하려는 인간의 요구를 표현하는 활동이 아니라, 먹고사는 데 필요한 필수재를 마련하기 위한 재미없는 작업이 되어버렸다고 믿었다.
ㆍ조립 라인 노동자로 분한 채플린은 일을 하다가 결국 미친 듯이 경련하는 자동인형으로 변한다. 기계가 움직이는 속도와 정밀성을 따라가기 위해 채플린은 스스로 기계 그 자체가 된다.
ㆍ사람들이 사회 구성원으로 역할을 하려면 끊임없이 자기감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다. - <감정노동>, 혹실드
ㆍ생화학 무기건 약품이건, 액션맨이건 교육적 게임이건, 포르노건 예술서적이건 상관없이 무엇을 생산하는 일이든 마음에 맞고 즐길 수 있는 업무 환경을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직업이 인도적이며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보장은 결코 할 수 없다.
ㆍ진정으로 의미있는 일이란 자기가 가진 기술적, 미적, 사회적 기준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도록 허용하는 노동, 다시 말해 효율성, 아름다움, 유용성을 자기 나름대로 정하고 그에 맞게 일하도록 허용하는 노동이라 정의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제공하는 일자리 중에서 이처럼 진정 의미 있는 일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면 뚜렷한 한계가 드러난다.
ㆍ여가시간 부족과 불안이라는 문제는 장시간 노동자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 질적으로 중요한 차원에서 널리 퍼진 문화적 현상이다. 여가의 질이 떨어지는 현상은 일상적 삶을 식민화하려는 폭넓은 경제적 요구가 유발하는 증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ㆍ자기 시간 중 얼마만큼을 분명 나만을 위한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정확히 언제, 우리는 경제적 부를 생산하거나 소비하라는 요구로부터 진정으로 풀려나서 세계와 그 문화를 정말로 자유롭게 경험할 수 있을까?
ㆍ자유시간이 전혀, 진정으로 자유롭지 않으며 노동자가 애써 탈출하기 원하는 힘에 지배당하는 한 계속 그럴 거라고 본다. - 아도르노
ㆍ자유시간이 일을 연장시킨다. - 아도르노
ㆍ미디어학자 저스틴 루이스(Justin Lewis)는 현대 자본주의를‘ 만족을 모르는 시대’라고 했다‘. 만족감을 찔끔 흘려주긴 하지만 곧바로 영구적인 불만족이 따라붙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소비재를 향한 끝없는 열망이 서구 사회에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가 될 정도로 자기 물건에 만족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경제적·문화적으로 편협한 체계 속에 살고 있다. 이제 남는 질문은 ‘어떻게’다. 자본주의 체계는 어떻게 노동시간 단축과 더 많은 여가를 위한 투쟁을 더 많은 물건을 향한 열망에 희생시키도록 설득했을까? 오늘날 소비자 지출을 유도하는 동기는 무엇일까?
ㆍ취업이 가능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은 자기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때 더욱 강화된다.
ㆍ고용 가능성이 요구하는 규율은 지속적이며 끊임없이 자기 감시를 요구한다. 이전에는 시간표에 따라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던 착취가 풀려나면서, 고용 가능성은 노동자가 거의 자발적으로 나서서 강요당하는 탈중심화한 착취 형태를 드러낸다.
ㆍ자본주의는 결국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필요를 생산하기 위한 체계인 것이다.
4장 일하는 이유
ㆍ나는 세상 사람들이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으며, 일이 고결하다는 믿음이 엄청난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본다. 현대 산업 국가는 여태 설파해온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버트런트 러셀
ㆍ여가 확대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유급 노동이 신성한 의무라는 믿음에 대한 고집스런 집착이다. - 버트런드 러셀
ㆍ개인이 보기에 아무리 거대하게 느껴져도, 제도적 세계의 객관성이란 인간이 생산하고 구성하는 객관성이다.
ㆍ인간은 세계를 변하지 않거나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마주한다. 세계는 인간이 품은 소망과 상관없이, 그 자신과의 다른 독립된 개체,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사물로서 거기 그대로 존재한다. 일상적 삶 속에서 이 소외는 껄끄러운 느낌으로 다가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미래 정해진, 짜인 규칙에 따르는 데에 삶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는 불편함과 압박감을 불러일으킨다.
ㆍ일을 거부하기까지 공통적으로 거치는 세 가지 경로 - 1) 형편없는 일자리, 2) 작은 이상향, 3) 망가진 몸
ㆍ삶이 어때야 하는지 체험해 보는 것이다.
ㆍ경제적으로 생존이 불가능한 대다수에게는 느리게 사는 삶이 허락되지 않는다.
ㆍ무엇이든 더 많이 사들일 수야 있지만, 그래봤자 그 모든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할 수는 없다.
ㆍ보다 느린 삶으로 탈출하기가 경제적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대다수에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편협한 태도다. 그러나 고소비적 생활양식이 누구나 열망해야 하는 불변의 규범이라는 생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분별한 태도다.
ㆍ대다수에게 일을 포기한다는 것은 극단적인 선택이며, 적게 일하기는 언제든 실행 가능한 선택지는 아니다.
ㆍ의미 없는 일자리, 또는 사회적 유용성이 낮거나 아예 없는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느라 맹렬히 뛰어다닐 게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 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여가, 그리고 생성한 부를 더욱 균등하게 나눌 방법을 찾아야 한다.
ㆍ'일을 하든 하지 않든, 필수재를 충당할 만한 일정 수준의 적은 소득을 모든 사람에게 보장해야 한다. - 버트런드 러셀
ㆍ기본소득은 기존 복지정책과 구별할 만한 새롭고 필수적인 두 가지 요소를 갖고 있다. 1) 기본소득은 보편적이라는 점이다. 2) 무조건적이라는 것이다.
ㆍ보다 창조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면서 일 윤리의 낡은 속성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토론을 이끌어갈 필요가 있다. 비노동 활동 나름의 문화적·사회적 가치를 이야기할 다양한 방법을 찾아내 경제적 합리성에 도전해야 한다. 유급 고용만이 아니라 훨씬 더 폭넓은 활동을 아우르는 의미로 일 개념을 재창조해야 하며, 일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가치 있는 활동도 하지 않는다는 이분법적 오류를 제거해야 한다.
ㆍ우리가 당연히 제공받아야 할 권리를 어째서 항상 충분하지도 않을 뿐더러 착취적이고 환경적으로 해롭기 일쑤인 일에 굴종해야만 얻을 수 있는 걸까? 우리는 왜 소득, 권리, 소속감의 필요를 채울 다른 방법에 대해서 정치적 토론을 시작하지 않는 것일까? 일 중심 사회에 다른 대안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상품을 통한 관계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연대와 목적의식을 성취하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사회는 너무나도 슬픈 사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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