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피로사회
신경성 폭력
ㆍ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ㆍ21세기의 시작은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ㆍ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를 장악한 이러한 면역학적 장치의 본질 속에는 어떤 맹목성이 있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는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ㆍ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
ㆍ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으로 인해 파멸하는데, 이를 피하려면 자아 편에서 타자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ㆍ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ㆍ적대성의 계보학은 폭력의 계보학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ㆍ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ㆍ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ㆍ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ㆍ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ㆍ성화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이다.
깊은 심심함
ㆍ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이다.
ㆍ오직 인간만이 춤을 출 수 있다.
ㆍ예술이란 '표현 행동'이다.
활동적 삶 vita activa
ㆍ사유도 계산이라는 뇌의 기능으로 전락한다. 제작과 행동을 아우르는 활동적 삶의 모든 형식은 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 시대는 모든 인간 능력이 전례 없이 영웅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출발했지만, 결국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귀결되고 만다.
ㆍ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ㆍ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보는 법의 교육
ㆍ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 <우상의 황혼> 니체 - 이러한 배움의 목표는 '고상한 문화'이다.
ㆍ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ㆍ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ㆍ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1) 긍정적인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2)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ㆍ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바틀비의 경우
ㆍ관습과 제도의 사회 속에 살고 있는 바틀비는 우울한 자아-피로를 초래하는 과중한 자아의 부담을 알지 못한다.
ㆍ바틀비는 자기 자신을 지시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를 지시하지도 않는 형상이다. 그는 세계 없이, 멍하고 무감각한 상태로 존재한다.
ㆍ바틀비의 실존은 죽음으로 향하는 부정적 존재다.
피로사회
ㆍ피로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ㆍ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ㆍ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ㆍ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울사회
ㆍ성과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 있다.
ㆍ프로이트적 자아가 해내는 일이란 무엇보다도 의무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ㆍ자기애는 자기 자신에 비해 타자를 폄하하고 거부한다는 점에서 아직은 부정성의 영향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ㆍ오늘날의 폭력은 적대적인 이견에서보다는 순응적 합의에서 나온다.
ㆍ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살의 능력을 낳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ㆍ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ㆍ건강은 자기 관계적으로 되며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
ㆍ이들의 생명은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의 생명과 비슷하다.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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