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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by mubnoos 2021. 1. 25.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상가. 실존 철학은 물론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쇼펜하우어는 여전히 철학계의 무시와 멸시를 당하는 무명학자 - 35년 동안 극단적인 냉대
이해받는 못한데에는 그의 난해한 '의지'개념 탓
끝없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주범
생명없는 무기물까지 이르는 모든 존재에 희지현상이 있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언제나 소수의 사람만을 위한 것이므로, 비상한 사유 방식을 지녀 이책을 향유할 능력이 있는 소수의 사람을 차분하고 겸허히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책을 다시 그냥 옆으로 치워 버리라고 충고하는 바다.

 

나중에 가서야 인정을 받는다. 동시대인이 아닌 오직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치있는 모든 것이 성과를 인정 받으려면 오랜시간이 필요했다.

 

 

진리란 자신을 갈망하지 않는 자에게 치근대는 창녀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다해도 그녀의 호의를 확신할 수 없는 쌀쌀맞은 미녀와 같다.

 

헤겔과 같은 정신적 괴물

 

내 철학은 칸트 철학에서 출발했으며,
비판철학으로 이미 칸트가 성가시게 굴고 있음에도

 

이성이란 허구를 믿게 하기만 하면 된다.

 

내게는 어떠한 타협도, 어떠한 동지도 없다. 오로지 진리만을 추구하는 자 외에는 아무도 내게서 이득을 얻지 못하고,

 

통찰밖에 제공할게 없다. 그래서 내 철학이 강단에서 논할 만한 것이 되려면 전혀 다른 시대가 와야만 가능할 것이다.

 

 

 

 

 

 

제1권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고찰
근거율에 종속된 표상/경험과 학문의 대상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인식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인간만이 이 진리를 반성적, 추상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인간은 태양과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느끼는 손을 지니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표상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즉 세계는 다른 존재인 인간이라는 표상하는 자와 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것이 그에게 분명하고 확실해진다.

 

 

이진리는 온갖 다른 형식인 시간, 공간 및 인과성보다 더 보편적인 경험, 생각해 낼수 있는 온갖 가능한 경험의 형식을 말하고 있고, 이 형식들은 이미 바로 이진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 충분근거율

 

 

표상
오감에 의해 인지되는 대상
의지와 표상과의 관계는 1) 플라톤의이데아 현실 2) 칸트의 사물자체와 현상, 3) 우파니샤드 철학의 브라마와 마야의 관계와 같다.

 

 

세계는 나의 의지다

 

모든 것을 인식하지만 어느 것에 의해서도 인식되지 않는 것이 주관이다.

 

형식은 공간과 시간이며, 이로 인해 다수성이 생겨난다. 그런데 다른 측면인 주관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주관은 표상하는 모든 존재에 나누어지지 않은채 존재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우리의 의식속에 선험적으로 존재 - 칸트의 주된 공적이자 매우 위대한 공적이다.

 

고유한 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경험이 직관을 선험적으로 인식하듯이 공간과 시간의 특성은 모든 가능한 경험에 법칙으로 간주된다.

 

연속은 시간의 전체 본질이다.

 

물질은 시간과 공간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작용이 없으면 물질의 표상도 없어져 버린다.

 

시간과 공간의 결합을 통해 비로소 물질, 즉 동시 존재와 이를 통한 지속의 가능성이 생긴다. 상태들이 변화하는 중에 이 같은 지속을 통해 다시 실체의 불변가능성이 생긴다.

 

언제나 시간과 공간에 동시에 관계되며 사실 그것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물질이나 인과성의 주관적 상관개념은 둘이 하나이므로 지성이며, 지성은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지성의 유일한 기능이자 유일한 힘은 인과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전체현실은 오로지 지성에 대해, 지성에의해, 지성속에서만 존재한다.

 

직관은 결과에서 원인을 인식하는 것이다. 모든 직관은 지성적인 작용이다.
-> 원인을 하나의 객관으로 직관-직접적이고 필연적이며 확실하다.

 

의지에대해 어떤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전혀 아무의미없다.

 

지성은 물질이라는 표상속에서, 즉 작용속에서 공간과 시간을 결합시킨다. 표상으로서의 이 세계는 지성에 의해서만 존재하듯이 또한 지성에 대해서만 존재한다.

 

지성이 직관을 만든다.

 

모든 직관이 감각적일 뿐 아니라 지성적이기도 하다. 즉 지성이 원인을 결과로부터 순수하게 인식한다는 것에 대한 확고하고 반박할 수 없는 증거인 셈이다.

 

인과성의 인식이 경험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인과성의 인식이 어떤 경험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의 선험성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의 실재성은 이제 다시 인과율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작용하는 세계 전체는 그 자체로 언제나 지성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으며 지성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세계는 선험적 관념성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인과율을 적용하는 예리함, 신속함, 용이함이라는 한가지 사실, 즉 지성의 힘이다.

 

지성에 의해 올바로 인식된 것은 실재성

 

객관도 주관도 아닌, 이 둘을 이미 포함하며 전제로 하는 표상
모두 하나의 공통된 표현 - 근거율

 

선험적 관념론: 근거율에 따라 주관으로부터 객관이 만들어지게 하거나 주관으로 짜이게 하는 것
자연철학: 구성이라 불리는 방법을 적용하여 객관에서 서서히 주관이 생기게 하는 것

 

주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객관적인 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자신을 드러내는 모든 원동력은 사실 의지로 설명할 수 있다.

 

자연과학의 목적과 목표는 인과성을 실마리로 물질의 모든 가능한 상태를 서로 환원시켜 결국 하나의 상태로 환원 시킨 뒤, 다시 서로에게서 이끌어내고 결국에는 하나의 상태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다.

 

모든현상은 인과성의 유대에 의해
처음으로 인식함으로써 전후로 무한히 이어지는 시간도 존재하게 된다.

 

표상의 재료는 개념이고, 그 주관적 상관 개념은 이성이다.

 

진리가 승리하기는 어렵고 힘들지만, 일단 승리를 거두면 다시는 빼앗기는 일이 없다.

 

동물은 현재속에서만 사는 데 비해, 인간은 현재와 더불어 미래와 과거 속에서도 산다.

 

현재의 강압에 대한 두려움만이 동물의 욕막을 제어할 수 있으며 결국은 그 두려움이 습관이 되어 - 습관으로 동물이 규정된다. 이것이 조련이다.

 

이성은 언어의 도움을 받는 것만으로 매우 중요한 성과를 거둔다.

 

더구나 학문, 이전의 경험을 보존하는 일, 공통된 내용을 하나의 개념으로 요약하는 일, 진리를 전달하고 오류를 퍼뜨리는 일, 사유하고 시를 짓는 일, 교리와 미신이 그러하다. 동물은 죽음에 직면해서야 죽음을 알게 되지만, 인간은 매순간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의식한다.

 

경험하기 이전에 확실하다는 것을 아는 능력 - 선험

 

언어는 개념이기에 직관적이지 않고 추상적이며,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개별적 표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다.

 

개념의 2층
추상개념과 구체개념

 

권역을 공간 도형으로 나타내는 것은 아주 훌륭한 생각이다.

 

논리학은 근거율의 단순한 부연 설명이다.

 

이성은 여성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

 

이성이 그 자체로 홀로 갖고 있는 것은 내용이 없는 조작의 형식뿐이다.

 

지식이란 판단을 자신의 정신력으로 마음대로 재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식의 정반대는 감정이다.

 

수로 옮겨 놓아야 한다. 수학. 산술로 전환되어야 한다.
수를 매개로 해야하고, 수로서만 직접 추상적 인식에 적응하는 것이다. 공간은 직관에 매우 적합할 뿐 아니라 3차원이라는 것에 힘입어 복잡한 관계조차 쉽게 개관할 수 있는 반면 추상적 인식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지식, 즉 추상적 인식의 가장 커다란 가치는 전달성과 고정시켜 보존될 가능성에 있다.

 

어떤 종류의 대상에 대해 완벽한 추상적 인식을 얻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 자만이 학문을 추구하려 한다. 그런 자는 개념에 의해서만 그 종류를 가려낼 수 있다. 그 때문에 모든 학문의 선두에는 하나의 개념이 자리하고 있고 이 개념을 통해 모든 사물의 전체에서 그 부분이 사유되며 학문은 그 전체롭터 완벽한 추상적 인식을 기대한다.

 

무엇보다도 학문적 대상의 개념내부에 일반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보다 넓은 권역으로 나아간다. 즉 학문은 개념권역의 상호관계를 규정하면서,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그 관계속에서 사유된 모든 것도 함께 규정된 셈이 되며, 이제 점점 더 좁아지는 개념 권역을 가려냄으로써 사유된 모든 것이 점점 더 엄밀하게 규정될 수 있다. 이로 인해 어떤 학문이 그 대상을 전적으로 포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보편-> 특수

 

어떠한 학문도 하나의 유일한 궁극적인 대전제에서 출발할 수 없으며, 여러개의 전제, 적어도 2개의 전제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수학은 어느 모로 보나 학문이다.

 

직관이 모든 명증성의 제1의 원천이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명증성에 관계를 갖는 것만이 절대적 진리이다.

 

진리의 발견은 언제나 직관된 필연성에 나온 것이며, 증명은 후에야 비로소 생각해 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관적 진리의 필연성을 인식하려면 그것을 발견해 낼 때의 사유과정을 분석하기만 하면 된다. 내가 수학강의에 바라는 것은 대체로 분석적방법이지 유클리드가 사용한 종합적 방법이 아니다.

 

수백년의 경험을 축적하고 비교할 필요가 있었으며, 지금도 그럴 필요가 있다. 여러가지로 경험적 확인을 거듭함으로써 가설에 의존하는 귀납이 보다 완벽해져서, 실제로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더이상 왜가 요구되지 않는 그런 관계

 

인과율에 환원하면 완전히 충분한 설명이 된다.

 

철학은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것도 결코 아는 것으로 전제하지 않고, 모든 것이 철학에서는 같은 정도로 낯설고 문제가 된다. 또한 여러 현산의 관계뿐 아니라 현상 자체도 문제 삼고, 다른 여러 학문이 모든 것을 거기에 환원시키고 만족하고 있는 근거율 자체도 문제 삼는다.

 

학문이 끝나는 곳에서 철학이 시작된다.

 

개념을 실생홀에 옮기기 때문에 실용적인 철학자 - 가장 행복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스토아학파 -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라곤 죽음밖에 없는 경우에는 자살을 권할 수 밖에 없다.

 

 

 

 

 

 

제2권 의지로서의 세계, 제1고찰
의지의 객관화

신체는 내 의지를 인식하기 위한 조건이다.
신체가 없이는 의지를 본래 표상할 수 없다.

 

신체의 각 부분은 의지를 발현시키는 주된 욕구와 완전히 상응해야 하며, 그러한 욕구의 가시적 표현이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모든 표상, 즉 모든 객관은 현상이다. 하지만 의지만이 사물 자체다. 의지 그 자체는 결코 표상이 아니고 표상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모든 표상, 모든 객관은 의지가 현상으로 나타나 가시화된것, 즉 의지의 객관성이다. 의지는 모든 개체 및 전체의 가장 심오한 부분이자 핵심이다.

 

사물- 의지
자연속에 있는 모든 힘 - 의지

 

개인은 사물 자체로서의 의지가 아니라 이미 의지의 현상이다.

 

신체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호흡을 동기에 의해 일어나는 의지의 발현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자석이 언제나 다시 북극으로 향하려는 집요함
쇠가 자석에 달라붙으려는 동경
전기의 양극이 다시 합치려는 격렬함
그리고 바로 인간의 소망처럼 방해하면 더욱 커지는 격렬함을 보게된다.
우리는 결정이 신소히 갑자기 생기는것을 보는데, 거기에는 형성의 많은 규칙성이 있으며, 그것은 응고되고 고정되면서 여러방향으로 향하려는 매우 단호하고 엄밀하게 규정된 노력이 분명하다.

 

일종의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자신의 무게에 의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쏠리기 때문이다. <신국론>

 

중력의 본질은 결국 물체에 고유한 경향과 욕망에 환원

 

뱀이 용이 되려면 반드시 어떤 뱀을 집어삼켜야만 한다
인간은 인간에 대한 늑대

 

모든 객관은 현상이며, 칸트의 용어를 빌면 현상체다.

 

존제하는 이세계는 그 전체 본질상 철저하게 의지인 동시에 철저하게 표상이다.

 

소망이 빨리 이루어지는 것은 행복이라 불리고,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을 고통이라 불린다.

 

 

 

 

 

 

제3권 표상의로서의 세계,제2고찰
근거율과 무관한 표상/ 플라톤의 이데아/예술의 대상

칸트가 무엇보다 주관에 대한 객관존재를 이들 형식의 하나로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 그의 실수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모든 현상, 즉 표상의 첫째가는 가장 보편적 형식이다.

 

객관이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 이외의 무언가에 도달하고, 주관은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의지에 도달하게 되면, 이렇게 하여 인식되는 것은 더 이상 개별적 사물 그 자체가 아닌 이념이고 영원한 형식이며, 이 단계에서 의지의 직접적인 객관성이다. 이렇게 직관하는 사람은 더 이상 개체가 아닌 의지와 고통이 없고 시간을 초월한 순수한 인식 주관이다.

 

의지 - > 표상

 

베다의 우파니샤드 - 이 모든 피조물은 모두 나다. 나 이외에는 다른 어떤 존재도 없다.

 

천재의 본질은 월들한 관조능력에 있다.
가장 완전한 객관성, 몰입할 수 있는 능력
한순간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순수한 인식 주관으로서 세계의 명백한 눈으로 남는 능력이다.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숙고를 거친 예술에 의해 파악된 것을 재현하기 위해, 흔들리는 현상으로 떠도는 지속적인 사고로 고정시키기 위해 필요한 만큼 사려 깊음을 요한다.

 

현재가 그들의 의식을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의식때문에 그들은 부단히 노력하게 되고, 고찰할 가치가 있는 새로운 대상을 끊임없이 찾게되며, 결코 만족할 줄 을 모르고 갈망하게 된다.

 

일상생활의 특별한 안락함을 맛본다. 상상력이 천재성의 본질적 구성요소
실제로 나타난 객관에 대한 그의 시야를 넓혀준다. 상상력이 이례적인 강렬함이 천재성의 요인, 즉 천재성의 조건이다.

유희를 하는 자는 몽상가이다.

 

천재는 인식력이 월등하기 때문에, 의지에 봉사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생 자체를 고찰하는 데 시간을 보내며, 사물의 다른 사물에 대한 관계를 고찰하지 않고 모든 사물의 이념을 고찰하려 노력한다.

 

천재적 인식은 여러관계를 지향하지 않는다.

 

광기가 섞이지 않은 천재는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천재는 미친사람과 서로 맞닿아 있다.

 

빛은 여러 사물의 가장 즐거운 요소이다.
색채는 직접 생생한 흥겨움을 맛보게 해주고, 색채가 선명해지면 흥겨움은 최고조에 달한다.
열(의지) - 빛(인식) - 색채(표상)

 

자신의 인행행로나 그것에서 생기는 불행을 개인의 운명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인류 일반의 운명으로 바라보고 따라서 그 경우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인식하는 태도를 취한다.

 

인간은 다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인간 본질의 드러냄이 예술의 최고 목표다.

 

왜곡되지 않고 소박하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나타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동물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사악한 마음이 생길 수 없다. 그는 자기 자신과 또 세계와 하나된 기분을 느낀다.

 

우아함은 시간적인 현상을 통한 의지, 즉 의지를 객관화하는 운동과 자세에 의한 완전히 올바르고 적당한 모든 의지 행위에 상응하는 표현이다.

 

자연과 삶에서 직접 퍼오는 진정한 작품만이 자연이나 삶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젊고 언제까지나 근원적인 힘을 지닌다. 그것은 시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낡아지지 않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신선하고 늘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알레고리- 상징 - 표징

 

음악은 다른 모든 예술과는 완전히 다르다. 음악은 아주 위대하고 근사한 예술이며 인간의 마음 싶은 곳에 참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쳐, 거기서 전적으로 보편적인 하나의 언어로서 인간에 의해 너무나 완전하고 심오하게 이해된다. 그 언어의 분명함은 심지어 직관적인 세계의 분명함조차 능가한다.

 

음악이 주는 효과가 다른 예술들이 주는 효과보다 훨씬 강렬하고 감독적이다.

 

음악
플라톤- 영혼의 감동을 모방하는 선율의 운동
아리스토텔레스-단순한 음에 불과한 리듬과 선율이 어째서 영혼의 상태와 비슷한가

 

 

 

 

 

 

제4권 의지로서의 세계, 제2고찰
자기 인식에 도달한 경우/삶에의 의지의 긍정과 부정

 

개체는 자신의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고, 무에서 생겨난 뒤 죽음을 통해 그 선물을 잃어버리고 무로 되돌아간다.

 

자연에서 중요한 것은 개체가 아니라 오로지 종속이며, 자연은 종속을 보존하기 위해 남아돌 정도의 무수한 씨앗과 수태 욕동의 커다란 힘을 통해 온갖 열성을 기울이며 낭비라고 할 만큼 배려하기 때문이다.

 

깊은 잠은 현재 지속되는 동안 죽음과 전혀 다를바 없고, 미래에 대해, 말하자만 깨어난다는 점과 관려해서만 죽음과 다를 뿐이다. 죽음이란 개체성이 잊혀버리는 잠이다. 즉, 다른 모든 것은 다시 깨어나거나 오히려 계속 깨어있는 것이다.

 

무로 돌아가버렸는데, 어찌하여, 바로 그, 묻는 자신은 이렇게 귀중하고 덧없는 홀로 실재하는 현재를 소유하는 행복을 누리고 있단 말인가? 보잘것 없는 자아가 실제로 현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지금, 그의 지금이 무엇때무에 바로 지금 존재 하는 것이며 이미 진작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기대할 수 없고자실을 통해 구원받을 수도 없다.

 

이념의 현상인 개체들이 시간속에서 생성소멸하는 것은 덧없는 꿈이다.

 

동물은 파멸에 직면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걱정없이

 

인간만이 추상적 개념으로 자신이 죽을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하고 다닌다.

 

인간은 확실히 머지 않아 죽게 마련이라는 생각에도 그다지 불안해 하지 않고, 누구나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마치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죽음을 있는 그대로의 것,
우리가 죽음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결코 고통은 아니다.

 

우리가 죽음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개체의 멸망이다.

개체의 본질 전체는 죽음에 저항한다.

 

삶에는 지속적인 고뇌가 본질적임을 인식하는 데는 이르지 않고, 삶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삶에서 완전히 행복함을 느끼며 또 조용히 숙고하면서, 그가 지금까지 겪어온 생애가 무한히 지속되기를 원하거나 또는 언제나 새로 되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그의 삶이 의욕이 너무 커서 삶을 향유하는 대신 삶에 따라 다니는 모든 고통과 고뇌를 자진하여 기꺼이 감수하려는 사람, 그런 사람은 단단하고 억센 뼈를 갖고 기초가 든든하고 지속적엔 대지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무한한 과거나 미래에 겁먹지 않을 것이다. 태양이 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이전의 모든 내용을 기억하는게 필요하다. 현재적인 것에 연결시킬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각 부분과 다른 부분과의 연관이 분명해지고 이제야 모든 부분은 서로가 서로를 조명하여 완전하게 환해지는 것이다.

 

칸트 - 경험적 성격과 동기가 완전히 주어져 있기만 한다면, 미래에 있을 인간의 행동은 일식과 월식처럼 계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본래 일반적으로 의욕하는 것, 인간의 가장 내적인 본질의 노력과 그 노력에 따라 그가 추구하는 목표, 이런 것들을 우리는 인간에 대한 외적인 영향과 가르침을 통해서는 결코 더 이상 변화시킬수 없다. 만약 변화시킬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개조하 수 있는 셈이다.

배울 수 없다. 변화시킬수 없다. 의지자체는 더더욱 변하지 않는다. 의욕은 배울수 없다.
의욕은 배울수 없으므로 변하지 않는다.
의지의 변화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인간이 자신의 성격을 개선하려고 노력하거나 나쁜 경향의 힘에 맞서는 것은 쓸데없는 수고다. 따라서 변경할 수 없는 것에 복종하고, 아무리 나쁜 것이라 해도 모든 경향에 즉각 따르는 것이 상책일지 모른다. 불가피한 숙명론 -모든것은 운명에 의해 최종적으로 예정되어 있다.

 

예지적 성격을 선험적으로 통찰할 수 없고, 경험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아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후험적으로 알뿐이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의욕하는지 알아야 하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인간은 성격을 나타낼수 있고,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무언가 옳은 것을 완수할 수 있다.

 

획득된 성격
추상적으로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제 분명히 의식된, 행동방식을 마치 습득된 것처럼 무척 분별 있게 실행한다.
현재의 기분이나 인상의 일시적 영향에 현혹됨이 없고, 중도에서 맞닥뜨린 개별적인 것의 쓰고 단 것에 방해받지 않고, 주저함이나 동요나 모순이 없다.

 

결정적으로 알고 있고, 온갖 선택을 할 때마다 보편적 명제를 개별적인 경우에 적응하기만 하면 즉각 결정에 이를 수 있다.

 

도달한 사람만이 언제나 완전히 분별있게 전적으로 그 자신이 될 것이다.

 

남의 특성과 특색을 모방하는 것은 남의 옷을 입는 것보다 훨씬 치욕적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판단을 스스로 표현한 셈이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의 성향과 모든 종류의 능력을 알고, 변경할 수 없는 그 한계를 아는 것이 이런 점에서 가능한 한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이다.

 

무섭게 미쳐 날뛰고 몸부림 치다가 그래봤자 아무 소용없음을 알고는 갑자기 다소곳이 목덜미에 멍에를 매게하고 이후부터는 쭉 길들여진 상태로 있는 신세와 같다.

 

아무것도 바꿀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고뇌 가운데 가장 쓰라린 고뇌, 즉 자신의 개성에 대한 무지, 그릇된 자부심과 거기서 생기는 불손함의 불가피한 결과인 우리 자신에 대한 불만에서 가장 확실하게 벗어나게 된다.

 

지능이 높을수록 고통도 그만큼 증가한다.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 가장 많은 고통을 겪는다.

 

언제나 연기된 죽음- 정신의 활기는 지속적으로 물리쳐진 무료함이다.
매순간 죽음과 싸우고 있다. 결국은 죽음이 승리하기 마련이다.

 

되도록 오랫동안 우리의 삶을 계속한다. 마치 비누방울이 언젠가는 터질 것임을 확실히 알면서도 되도록 오랫동안 커다랗게 부는 것과 마찬가지다.

 

힘겨운 투쟁을 견디는 것은 삶에 대한 사랑이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피하려해도 피할 수 없고, 어느때라도 다가올수 있다.삶 자체는 암초와 소용돌이로 가득찬 바다이며 인간은 최대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이를 피하려 하지만, 안간힘을 쓰고 재주를 부려 뚫고 나가는데 성공한다 해도, 사실 그럼으로써 한발짝씩 전면적이고 피할 수 없으며 재기 불가능한 최악의 난파에보다 가까이 다가간다. 아니 바로 난파를 향해, 즉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죽음이야말로 힘겨운 항해의 최종목표이며, 인간에게는 그가 피해온 어떤 암초보다도 나쁜것이다.

 

모든 생물이 마음을 쏟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현존에 대한 노력이다. 하지만 현존이 보증되면 그들은 무슨일을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지속적인 충족은 실현될수 없다.

 

인생은 이미 그 모든 성향에 따르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고, 본질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한 고뇌이며 전적으로 불행한 상태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확신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식이 생기고부터는 자신을 의욕하는 존재로 여기는데, 인간의 인식은 자신의 의지에 계속 관계하는 것이 보통이다. 인간은 먼저 자신의 의욕의 대상을, 그다음에는 이 대상을 얻기위한 여러수단을 완벽하게 알려고 한다. 이제 그는 자신이무엇을 해야하는지 알고 있으며, 다른 지식을 얻으려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는 행동하고 활동한다. 즉, 그는 언제나 자기의욕의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의식에 의해 유지되고 활동한다. 그의 사유는 이 수단들의 선택에 관련된다. 거의 모든 인간의 삶이란 이렇다. 그들은 의욕ㅎ고, 스스로 의욕하는 바를 알고, 이것을 얻으려고 노력하여 절망에 빠지지 않을 만큼 성공을 거두고, 무료함과 그 결과에 시달리지 않을 만큼 실패를 맛본다.

 

 

제1의 노력은 자기보존
종의 보존에 힘쓸뿐 - 자연의 내적본질이 삶에의 의지 자체이듯이 자연도 있는 힘을 다해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내몰아 번식하게 한다. 그런 후에 자연은 개체와 더불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 되어 개체의 파멸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삶에의 의지로서 자연에서 중요한 것은 종속의 보존밖에 없고, 개체는 자연에게 하등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지는 이들 현상 중 어떤 현상에도 전적으로 또 분할되지 않고 현존하며, 자기주위에서 자신의 본질의 형상이 수없이 되풀이 되는 것을 본다. 정말로 실재하는 것을 직접 자신의 내부에서만 발견할 뿐이다.

 

필연적으로 세계도 멸망하여,
따라서 대우주에 버금가게 평가될수 있는 하나의 소우주

 

무한한 세계에서 전적으로 보잘것없고 무로 축소되는 모든 개체는 그럼에도 자신을 세계의 중심점으로 삼고, 자신의 생존과 안녕함을 다른 모든 것에 앞서 고려하며, 그러니까 자연적인 입장에서는 다른 모든 것을 이것을 희생할 용의가 있으며, 바다의 물 한 방울에 불과한 그 자신을 단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계도 없애버릴 용의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성향이 자연속의 모든 사물에 본질적인 이기심이다. 바로 이 이기심이야말로 의지의 그 자신과의 내적 충돌을 끔찍하게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이 이기심의 존립과 본질은 앞서 말한 소우주와 대우주의 대립에 있기 때문이다.

 

홉스 시민론 -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국가 자체는 불필요할지 몰라도 올바른 전제 아래

 

아리스토텔레스 국가 - 사람들이 잘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행복하고 멋지게 산다는 뜻이다.

 

현존재가 헛된 무로의 이행

 

 

칸트철학 비판

칸트의 가장 큰 공적은 사물들과 우리사이에 여전히 지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명을 토대로 현상을 사물자체와 구별한 점이다.

 

칸트의 가르침은 세계의 끝과 시작은 우리의 외부가 아닌 우리의 내부에서 찾아야한다는 통찰을 준다.

 

칸트는 현상이 표상이고,사물자체는 의지라는 인식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는 의지 속에서 사물자체를 직접 인식하지 못했다.

 

칸트는 어디서도 직관적 인식과 추상적 인식을 분명히 구별하지 않았다.

 

직관은 실제로는 지성적인데, 칸트는 바로 이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칸트는 사물자체를 어디섣 특수한 설명이나 분명한 연역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칸트는 철학에서 유신론을 제거했다.

 

칸트의 선구자는 흄이다.

 

 

 

쇼펜하우어

  • 유복한 어린시절
  • 이성주의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 / 헤겔의 관념론에 정면으로 반대
  •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큰 영향
  • 염세주의자 허무주의자
  • 프랑스 대혁명- 고통의 현장 - 삶이 무엇인기에 대한 강한 의문- 의지철학의 근원
  • 유전적 우울증- 안전과민증, 청각장애, 우울증
  • 독일인 남성에 큰 혐오감
  • 엄청난 대식가
  • 결혼을 포기
  • 로시니, 모차르트
  •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읽었기 때문에 철학자가 될 결심을 했고,
  • 비트겐슈타인은 쇼펜하우어 철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철학을 시작했고,
  • 아인슈타인은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읽고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 상대성이론을 낳았다.
  • 앙드레지드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 쇼펜하우어는 그저 자명하다는 듯이 신을 매장한데 반해
  • 니체는 요란하게 신의 죽음을 알린다. - 차라투스트라
  • 라이프니츠 모나드론 - 이성적 추론이 뿌리박고 있는 2가지 근본원리 - 모순율, 충분근거율
  • 네 가지 충분근거율 - 생성/존재/인식/행위
  • 쇼펜하우어의 동지 스피노자
  • 독일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쇼펜하우어의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