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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학 / 프리드리히 니체

by mubnoos 2021.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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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논문 ‘선과 악’, ‘좋음과 나쁨’

  • 우리는 도덕적 가치들을 비판하는 일이 필요한데, 이 가치들의 가치 자체가 일단 의문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러한 가치들이 성장하고 발전해서 변화해 온 조건과 상황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그러한 지식은 존재한 적도 없었고 사람들이 그러한 지식을 가지려고 한 적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가치들'의 가치를 주어진 것으로, 기정사실로,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인간 일반에 관련하여, 인간의 미래를 포함하여, 진흥, 유용성, 번영이라는 의미에서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일에 조금도 의심하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만약 그 반대가 진리라고 하면 어떠할까? '선한 사람'에게도 퇴보의 징후가 있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위험, 유혹, 독이며 가령 현재를 살기 위해 미래를 희생한 마취제가 있다면 어떠할까? 아마 현재의 삶이 좀 더 안락하고 덜 위험하지만 또한 보다 하찮은 방식으로 더 저열해지는 것은 아닐까?
  • 인간이라는 유형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강력함과 화려함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면 바로 도덕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 도덕이야말로 위험들 중의 위험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 이 명랑함, 나의 말로 하자면 즐거운 학문은 보람 있는 일이다. 물론 모든 사람의 관심사는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용감하고 근면하며 남몰래 진지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보람 있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전진하라! 우리의 낡은 도덕도 희극에 속하니라!”라고 진심으로 말하게 되는 날에 우리는 ‘영혼의 운명’에 관한 디오니소스적인 드라마를 쓰기 위한 새로운 갈등과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좋음’이라는 판단은 ‘호의’를 받은 사람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좋은 사람들’ 자신, 즉 고상한 사람, 강한 사람,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과 고매한 뜻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이들은 모든 저급한 것과 저급하다고 생각되는 것, 비열하고 천민적인 것과는 달리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선하다고, 즉 최상급의 것으로 느끼고 평가한다. 
  • ‘좋음’과 ‘나쁨’이라는 이러한 개념을 애당초부터 너무 무겁거나 너무 폭넓게, 또는 심지어 상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 오늘날 교회는 사람을 유혹하는 것 이상으로 소외시키고 있다. 만약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혹시 우리들 중에 누가 자유정신이 될 것인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교회이지 교회의 독이 아니다. 교회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 독을 사랑하는 셈이다
  • ‘인간’이라는 맹수를 잘 길들여서 온순하고 개화된 동물, 즉 가축으로 만드는 데에 모든 문화의 의의가 있다는 것이 오늘날 어쨌든 ‘진리’로 생각되고 있는데, 만일 그것이 맞는 말이라면, 고귀한 종족의 이상과 함께 그들에게 결국 치욕을 안기고 그들을 제압한 원동력이 된 저 모든 반동 본능과 원한 본능이야말로 실질적인 문화의 도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런 본능의 소유자가 동시에 문화 자체도 내보인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아니! 이것은 오늘날 명백한 사실인 것이다! 
  • 보복하지 않는 무력감은 '선함'으로 바뀝니다. 소심한 비겁함은 '겸허'로 바뀝니다. 약자의 비공격성, 그에게 풍부한 비겁함 자체, 그가 문가에서 서서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이 여기서는 입에 발린 말로 '인내'가 되고, 또한 미덕으로 불릴지도 모릅니다. 복수할 능력이 없는 것이 복수할 마음이 없는 것으로 불리고, 심지어는 용서로 불릴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원수를 사랑하라고도 말합니다.
  •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이라는 대립되는 가치는 이 지상에서 수천 년간 끔찍한 싸움을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가치가 오래 전부터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하더라도 아직도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고 싸움이 계속되는 곳도 없지 않다. 그 동안 싸움이 더욱 격화되고 그로써 더욱 더 심화되어 점점 더 정신적으로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 결과 오늘날 ‘보다 높은 본성’, 보다 정신적인 본성을 나타내는 표시로서 이러한 의미에서 분열되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사실상 아직 이러한 대립되는 가치의 전쟁터가 되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전체 역사를 통해 오늘날까지 읽을 만한 것으로 남은 어떤 저서에 의하면 이 싸움의 상징은 ‘로마 대 유대, 유대 대 로마’를 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싸움보다, 이 문제제기보다, 이 불구대천의 대립보다 더 큰 사건은 없었다.
  • 사실 망각이 하나의 힘, 억센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내는 어쩔 수 없이 망각하게 마련인 이 동물은 반대 능력, 즉 기억의 도움으로 어떤 경우에, 말하자면 약속해야 하는 경우에 망각을 제거하는 기억력을 길렀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단 새겨진 인상에서 다시 벗어날 수 없다는 단순히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고, 일단 명예를 걸고 약속한 말을 지킬 수 없다는 소화불량이 아니라, 다시 벗어나지 않으려는 의욕의 능동적인 상태이고, 일단 하려던 것을 계속 하려는 것이며,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인 것이다. 그리하여 본래적인 ‘나는 원한다’, ‘나는 할 것이다’, 그리고 의지의 본래적인 표출, 그 의지의 행위 사이에는 새로운 낯선 사물과 상황의 세계, 심지어 의지 행위인 하나의 세계가 의지의 이러한 긴 연쇄 고리를 단절시키지 않고 서슴없이 끼어들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전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처럼 미래를 미리 마음대로 하기 위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과 우연히 일어나는 일을 구별하는 법을, 연관관계에 따라 사고하는 법을, 먼 앞일을 현재의 일처럼 보고 예견하는 법을,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그 수단인지 확실히 정하고 대충 계산하며 예측할 수 있는 법을 먼저 배웠어야 하지 않는가! 약속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듯이, 결국 그런 식으로 자신의 미래를 보증할 수 있기 위해, 인간 자신이 먼저 자기 자신의 표상에 대해서조차도 예측 가능하고 규칙적이며 필연적인 존재가 되었어야 하지 않는가.

제2논문 ‘죄’, ‘양심의 가책’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

  • 모든 손해에는 보상이 될만한 등가물이 있으며, 심지어 가해자에게 고통을 주어서라도 실제로 배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의해 이 분노는 억제되고 변경되었다. 태곳적부터 깊이 뿌리박힌, 어쩌면 다시는 뿌리 뽑을 수도 없을 이 생각, 즉 손해와 고통이 등가개념이라는 생각은 어디서 힘을 얻었던 것일까? 내가 이미 밝힌 바이지만, 그 힘의 출처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계약관계에, '권리주체'라는 개념만큼이나 오래되고, 그 나름대로 다시 구매, 판매, 교역, 상업이라는 근본 형식으로 되돌아가는 계약관계에 깃들어있는 것이다.
  • 사실 고통에 대해 분격하게 만드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다.
  •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삶을 잘 이해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며 (예컨대 '신'과 같은 존재를 지어내어) 자신의 '불행'을 정당화하는 재주가 능숙해지게 되었다.
  • 구매와 판매는 그 심리적 부속물과 아울러 어떠한 종류의 사회조직이나 집단의 시초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오히려 교환, 계약, 죄, 권리, 의무, 보상 등의 싹이 되는 감정은, 힘과 힘을 비교하고 재며 헤어려보는 습관과 더불어, 개인의 권리는 가장 초보적인 형태에서 가장 조야하고 가장 원시적인 공동체 복합체로 옮아갔다.
  •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고대인류 사고 특유의 굼뜬 일관성으로, 사람들은 곧바고 어느 사물에나 가격이 있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치러질 수 있다고 뭉뚱그려 일반화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의에 관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순진한 도덕규범이며, 지상에서의 온갖 선량함, 온갖 공정성, 온갖 선의, 온갖 객관성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최초의 단계에서 정의란 거의 동등한 힘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타협하고 조정을 통해 다시 합의를 보려는 선의이며, 보다 힘이 떨어지는 사람들에 관련해서는 그들끼리 조정에 이르도록 강요하는 선의이다.
  • 진보의 정도는 그것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 모든 것의 양에 의해 측정된다.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보다 강한 개별 인간 종족의 번성을 위해 희생된다는 것 - 이것이 진보일지도 모른다.

 

제3논문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행복하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너무 많은 불행이 있지 않은가!
  • 행복한 자, 성공한 자, 몸과 마음이 강한 자가 신의 행복권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보다 더 크고 더 숙명적인 오해는 없을 것이다. 이런 거꾸로 된 세계는 없어져 버려라!
  • 내가 괴로운 것은 누군가에게 분명히 책임이 있는 것이다. - 이런 방식의 추론이 병든 모든 자의 특징이며, 더구나 그럴수록 그들이 괴로운 진짜 원인, 생리적인 원인은 더욱 은폐된 채로 있게 된다. 고통받는 자는 고통을 주는 정동에 대한 구실을 찾는데 무서울 정도로 열성적이며 독창적이다.
  • 특히 기독교는 더없이 재기발랄한 위안제의 보물창고라 할 수 있겠다. 그 안에는 너무나 많은 청량제, 완화제, 마취제가 쌓여있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너무나 많은 더 없이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 감행되었던 것이다.
  • 모든 커다란 종교의 중요한 문제는 유행이 되다시피 한 어떤 피로나 중압감을 퇴치하는 것이다.
  • '개선시킨다' 내게는 이 말이 '길들인', '악화된', '사기를 잃은', '세련된', '유약해진', '기가 죽은'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 '아무것도 진리가 아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소위 이런 '자유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자유와 해방보다 더 낯선 것도 없다. 그들은 어떤 점에도 단단히 매어있지 않지만 바로 진리에 대한 믿음이라는 점에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 더 단단히 매어있고 무조건적이다.

  • 인간은 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 이러한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변명하고 설명하며 긍정할 줄 몰랐으며, 자신의 생존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시달렸다. 인간은 그 밖의 문제로도 시달렸는데, 그는 본질적으로 병적인 동물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가? 라고 외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었다는 점이다.
  • 금욕적 이상은 인류에게 하나의 의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일한 의미였다. 그리하여 어마어마한 공허가 메워진듯이 보였다. 이러한 해석으로 모든 고통을 죄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증오, 더욱이 동물적인 것, 물질적인 것에 대한 증오, 감각이며 이성 자체에 대한 혐오, 행복과 미에 대한 두려움, 온갖 가상, 변화, 생성, 죽음, 욕망 자체에서 벗어나려는 갈망. 이 모든 것은 삶에 대한 반감,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에 대한 반항을 의미한다.

 

 


mubnoos

니체는 정말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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