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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샐리 케이건

by mubnoos 202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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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 프란츠 카프카

 

“사후의 삶의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이자 심오한 철학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질문은 ‘착각’에 불과하다. 조금만 더 진지하게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해본다면 누구라도 그 대답이 ‘아니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죽은 다음에도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삶이 끝난 상태에서 삶이 존재할 수는 없다. 19

 

이원론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이뤄져 있다고 말한다. 반면 물리주의는 ‘영혼은 없다’고 말한다. 물리주의에서 비물질적인 존재가 설 곳은 없다. 오직 육체만이 존재한다. 26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관념’뿐이다. 여기서 ‘물질적 존재’는 마음이 품고 있는 관념 또는 이와 비슷한 것들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편의적 도구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물리적인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우리가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일종의 환상이자 형이상학적 착각일 뿐이다. 철학에서 이런 관점을 ‘유심론, idealism’이라고 부른다. 26

 

이원론자들의 말대로 영혼이 정말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혼 역시 얼마든지 육체와 더불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 32

 

결론적으로 말해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육체적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 더 많은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이 육체적 사망 이후에 살아남았다고 해보자. 정말 그렇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더 오래 생존할까? 영원히 이어질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불멸의 존재인가? 34

 

우리의 정신적인 삶은 이처럼 경험의 질적 측면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어떤 순수한 물리적 존재도 이와 같은 특성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기계도 고통을 느끼고, 빨간색을 인식하며, 희열을 맛보지 못한다. 기계는 경험의 행동적 측면을 가질 수는 있으나 질적인 측면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두 가지 측면 모두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수한 물질적 존재 이상이다. 인간은 기계 이상의 존재인 것이다. 62

 

물리주의는 아직까지 의식의 존재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이원론도 마찬가지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아직까지 어느 관점도 우월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의식의 문제는 여전히 양측 모두에게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66

 

인간이 결정론에 지배를 받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다소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양립주의, compatibilism’라고 부른다. 77

 

데카르트는 “육체와 정신이 이론적인 차원에서 서로 다른 존재”라고 말한다. 육체와 정신은 같은 것이 아니다. 앞서 우리가 상상했던 육체 없이 정신만 존재한 아침, 상상이라도 그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동일한 차원에서 육체와 정신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둘 중 하나만 존재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걸까? 만약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육체와 정신이 동일한 존재라면, 우리는 둘 중 하나만 존재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90

 

데카르트는 육체 없이 정신만 존재하는 상황을 상상했고 우리는 그런 상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둘은 서로 다른 존재다. 그렇기 떄문에 하나 없이 다른 하나가 존재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육체와 정신이 서로 다른 존재라고 주장했다. 정신은 육체와 다른, 육체를 초월한 존재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다. 93

 

영혼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육체적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육체가 사망할 때 영혼도 얼마든지 함께 소멸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나는 처음부터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영혼의 불멸성은 논할 가치가 없다. 105

 

세상 만물은 완벽한 정의, 아름다움, 건강, 선함 그 자체의 일부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형상은 세상의 일부가 아니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상적인 것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을 현실에서 발견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요컨대 오로지 마음만이 플라톤의 형상을 이해할 수 있다. 110

 

우리는 완벽한 정의를 떠올릴 수 있지만,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완벽한 정의란 또 다른 추상적인 실체, 즉 플라톤의 형상이다. 그 밖에 선함, 건강, 아름다움에 대해 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이들 모두 플라톤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란 형이상학에 대한 깊이 있는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형상의 세계이자, 일상적이고 익숙한 물리적 세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왕국을 말한다. 112

 

소크라테스는 형상이 갖고 있는 불멸성의 본질로부터 영혼의 불멸성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우리는 그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구분해볼 수 있다. 형상은 영원하며 비물질적인 존재다. 이성은 형상을 이해할 수 있다. 영원하며 비물질적인 존재만이 영원하며 비물질적인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성은 영원하며 비물질적인 존재다 이성이 비물질적인 존재라는 것은 곧 영혼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 117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은 영원하며 소멸하지 않는 ‘단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단순함, simple’이란, 하위 구성물로 이뤄지지 않은 순수한 존재를 의미하는 형이상학 용어다. 반면 조합물에 대해서는(적어도 이론적으로) 그 구성요소들을 해체한 상태, 즉 소멸된 상태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존재는 해체하는 방식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해체할 수 있는 구성요소들이 없기 때문이다. 122

 

저 유명한 ‘국가’에서 플라톤은 “영혼은 세 가지 다른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고 일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세 부분이란 이성을 관장하는 ‘합리적 부분’, 의지와 같은 ‘정신적 부분’, 그리고 식욕, 성욕 소유욕 등과 같은 ‘욕망적 부분’을 말한다. 즉 영혼이 ‘조합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135

 

우리는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핵심에 관한 세 가지 이론인 ‘영혼 관점’, ‘육체 관점’, ‘인격 관점’ 을 살펴봤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관점을 선택해야 할까? 191

 

원래의 인격 관점이 “동일한 인격을 갖는 것이 동일한 인간이라고 말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말하는 데 그치고 있다면, 새롭게 제기하는 수정된 버전은 “분할과 복제로 인한 복수의 결과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을 배제해야 한다”는 조건을 추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동일한 인격을 필요충분조건으로 인정하면서도 분열과 복제가 없어야 한다는 새로운 조항을 달고 나온 것이다. 분열과 복제가 있다면, 그 누구도 동일 인물이 아니다. 213

 

철학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정체성의 본질은 나와 관련된 특정한 사실 또는 나라고 하는 인간의 다양한 단계들 사이의 관계에만 의존한다.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외적 상황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분열 불가 조건을 수용해야 한다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다른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해 분열 불가 조건 때문에 정체성의 문제는 엄밀히 말해 더 이상 내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외부적인 문제가 돼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분열 불가 조건을 포기한다면, 인격 관점까지도 함께 포기해야 하는 파국에 이른다. 215

 

나는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핵심이 “분열 불가 조건을 추가한 상태에서 동일한 육체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인격 관점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여러분의 결정이다. 나는 정답을 제시할 수 없다. 233

 

내가 주목하고 있는 질문은 “내가 생존해 있을 것인가?”가 아니라, “생존을 통해 내가 원하는 가치를 얻을 수 있을까?”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단지 동일한 몸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내가 원하는 가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동일한 인격을 유지하면서 생존하는 것이다. 238

 

만약 내 육체가 소화, 혈액순환, 호흡 기능은 정상적으로 수행하고 있지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고차원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특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면, 나는 살아있으며 존재하고 있지만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253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미스터리라고 말한다. 자신이 죽은 상태를 상상해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설명한다.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이제 일인칭 시점으로 자신이 죽은 상태에 대해 상상해보자. 우선 인지 기능들이 멈출 것이다. 들을 수도,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어떤 상태일지 상상해본다. 아, 이것 역시 어렵다. 그러면 포기하고 이렇게 말한다. “죽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상상 하기도 어려워. 그저 미스터리일 뿐이야.” 269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꿈 없는 잠을 잘 수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기절을 경험하지 못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죽어 있는 상태를 상상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믿기 위해서는 상상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철회해야 하는가? 271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한 사람의 죽음은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 있고, 이를 상상하려고 할 때마다 자기 자신이 한 사람의 관객으로 끼어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심리분석 차원에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사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또는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 우리 모두는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불멸을 확신하고 있다.” 273

 

모든 인간은 홀로 죽는다. 이 말은 우리에게 죽음의 본질에 관련해 심오하고 중요하며 흥미로운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282

 

데이비드 흄은 죽는 순간까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 죽음을 앞두고 흄은 사람들을 불러놓고 병상에 둘러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다. 끝까지 그는 유쾌하고 즐거운 모습이었다. 293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다면 죽고 나서 자신의 영혼에 벌어질 일에 대해 걱정하게 된다. ‘천국에 가게 될까, 지옥으로 떨어질까?’ 죽은 다음에 자신의 영혼이 겪게 될 운명에 대해 걱정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죽음이 정말로 끝이라고 믿는다면 죽음은 내게 나쁜 것이 될 수는 없을 듯하다. 내가 없는데 대체 무엇이 내게 나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죽음은 내게 그 어떤 악도 될 수 없다. 296

 

독일의 시인 클롭슈토크(Friedrich Gottlieb Klopsock)의 ‘이별,  Separation’이라는 시. 시신이 우리 곁을 지날 때 당신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네. 죽음이 두려운가? “아니오.” 그러면 뭐가 두려운 거지? “죽어가는 과정이.” 나는 그것마저도 두렵지 않네. “그러면 두려운 게 없는가?” 아, 나는 두렵고 또 두려워…”대체 무엇이?” 친구들과 작별해야 한다는 사실이. 헤어짐은 나의 이별이자 또한 그들의 이별이기에. 그래서 나의 그늘은 영혼 깊은 곳에서 당신의 그늘보다 더 어둡다네. 시신이 우리 곁을 지날 때. 297

 

왜 죽음이 나쁜가? 죽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존재는 왜 나쁜 것인가? 삶이 선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있으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좋은 것들을 죽고 나면 하나도 누릴 수 없다. 삶의 좋은 모든 것들을 박탈해버리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는 설명은 오늘날 ‘박탈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304

 

고대 그리스철학자 에피쿠로스의 글. “그러므로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대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306

 

로마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죽음이 나쁜 것이라는 주장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예상이 암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고 이야기했다. … 루크레티우스는 묻는다. “죽음이 정말로 나쁜 것이라면,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영겁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울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그는 말한다.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영겁의 세월이 있었다는 사실에 우울해하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죽은 ‘이후’ 무한한 비존재의 상태가 이어진다고 해서 우울해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루크레티우스는 결론 내리고 있다. 322

 

박탈이론을 토대로 죽음이 나쁜 이유는, 죽고 나면 삶이 가져다 주는 모든 축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어서다. 살아있을 때 삶이 가져다 주는 선물을 하나도 누릴 수 없기 때문 에 죽음은 우리에게 나쁜 것이다. 이것 말고는 어떤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333

 

이제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첫째, 박탈 이론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영생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박탈이론을 받아들이면서 영생의 가치를 부정한 다면 모순에 처하고 마는가? 둘째, 모순의 문제는 제쳐두고 영생은 정말로 좋은 것일까? 335

 

박탈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삶에서 좋은 것들을 얻고 있어야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앞으로 펼쳐질 삶이 ‘전체적으로’ 좋은 것일 때만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35

 

영생이 나쁜 것이라고 해서 죽음이 좋은 것은 아니다. 언제 죽든지 간에 우리는 항상 자신이 ‘너무 일찍’ 죽는다고 한탄할 것이다. 결국 죽음은 더 이상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우리 모두 죽음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340

 

내가 계속 강조했던 핵심은, 박탈 이론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죽음이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영생이 갈망할 만큼 가치 있는 삶이 아니며 결국 끝없는 악몽으로 드러나게 될 거라는 내 생각이 옳다면,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은 영생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탈출구와 같은 것으로서 우리에게 오히려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50

 

철학자들은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도구적 가치’라고 하고, 목적으로서의 가치를 ‘본질적 가치’라고 부른다. 좋은 것과 나쁜 것들로 이뤄진 목록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것들 대부분 도구적인 가치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354

 

철학적 관점에서 흥미로운 질문은 “무엇이 그것 자체로 가질 만한 또는 피해야 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355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감정적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다른 결과는 처음부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른 선택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슬퍼할 이유가 사라져버린다고 스피노자는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죽음의 필연성을 이해하고 이를 내면화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덜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377

 

죽음의 또 다른 측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필연성과 가변성 그리고 예측불가능성에 더해 다음으로 살펴볼 측면은 죽음이 ‘언제 어디서나, ubiquitous’, 일어난다는 사실 이다. 이 말은 주변 어디서나 항상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분이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 388

 

미국의 SF작가 Orson Scott Card의 단편소설. 소설 속에서 인간은 우주의 모든 생명체 중 유일하게 죽는 종이다. 당연하게도 영원히 죽지 않는 다른 생명체들을 부러워 한다. 인간에게 영생은 매력적인 대상이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좋은 것이다. 반면, 우주의 다른 생명체들은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이유로 인간을 부러워한다. 제한된 시간 동안만 가질 수 있는 소중한 가치를 오로지 인간들만이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394

 

두려움을 적절한 감정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 조건 모두를 충족시켜야 한다. 즉, 두려움의 대상은 나쁜 것이어야 하고, 그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무시하지 못할 만큼 높아야 하며, 그 일이 벌어질 거라고 확신할 수 없어야 한다. 415

 

죽음이 두려워할 만한 대상이라고 말하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측면은 죽음의 예측불가능성이다. 죽음에 예측불가능성이 없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적절한 감정이 될 수 없다. 죽어 있는 상태 그 자체는 두려움을 느낄 대상이 아니다. 내가 이해하는 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죽음의 예측불가능성에 있다. 420

 

미국 소설가 Kurt Vonnegut의 책 ‘고양이 요람, Cat’s Cradle’에 실려 있는, 보네거트가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 낭송할 기도문. “신은 진흙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신은 진흙 덩어리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덕과 바다와 하늘과 별, 내가 빚은 모든 것을 보라.” 한때 진흙이었던 나는 이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봅니다. 운 좋은 나 그리고 운 좋은 진흙. 진흙인 나는 일어서서 신이 만든 멋진 풍경들을 바라봅니다. 위대한 신이시여! 오직 당신이기에 가능한 일. 결코 나는 할 수 없는 일. 당신 앞에서 나는 그저 초라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내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유일한 순간은, 아직 일어나 주변을 둘러볼 기회를 갖지 못한 다른 모든 진흙들을 떠올릴 때.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지만, 진흙들 대부분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영광에 감사 드릴 뿐. 진흙은 이제 다신 누워 잠을 청합니다. 진흙에게 어떤 기억이 있을까요. 내가 만나봤던, 일어서 돌아다니던 다양한 진흙들은 얼마나 놀라운지. 나는 내가 만났던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427

 

삶에서 어떤 것들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묻는 것은 결국 다음과 가은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어떤 목표가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으며 의미 있는 것인가? 이는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433

신이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삶을 원하는가? 맛있는 음식과 술 그리고 순간의 쾌락으로 가득한 삶인가, 아니면 의미 있는 성취로 이뤄진 삶인가? 네게 약속하노니 어떤 삶은 선택하든 간에 너는 그것을 이룰 것이다.” 그럼 여러분 대부분은 후자의 삶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성취를 추구하는 가치 있는 삶은 실패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 일상적이고 가치 있는 목표들을 적절한 비율로 혼합한 세 번째 전략이야 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거대한 선을 추구하는 삶, 사소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 두 가지를 혼합한 형태의 삶 중에 어느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든지 간에, “더 많은 것들을 채워 넣을수록 인생의 가치는 더 높아질 것”이라는 주장은 과연 진실일까? 다다익선이 항상 진리인가? 434-435

삶은 좋은 것이고 그것의 상실은 나쁜 것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삶은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서양적 사고방식. 반면 삶의 상실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는 동양적 사고방식. … 불교의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는 삶은 ‘고통’이라는 가르침이다. 446

 

데이비드 흄은 말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인간을 창조하고 생명을 불어넣은 창조주의 뜻이라면, 자살 역시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482

 

도덕성과 관련해 결과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대표적 이론은 ‘공리주의, utilitarianism’을 꼽을 수 있다. 공리주의는 모든 이들의 행복을 평등하게 놓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행복을 가져다 주었는지를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도덕이론이다. “지금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똑같이 고려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공리주의는 말한다. 490

 

장기이식이 필요한 여러 명을 살리려고 한 사람을 죽이는 게 잘못된 행동인 것처럼,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자신’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자살이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전체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생명의 권리가 그 어떤 결과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무론자들은 단호하게 자살을 금기시한다. 496

 

그러나 프레드를 죽일 때 다섯 명을 살리려고 한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지만, 자살할 때 나는 내 자신을 위해서 나라는 한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내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은 합리적 도덕적으로 타당할 수도 있다. 497

 

 결코 합리적 태도라고 볼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나는 ‘부적절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너무 빨리 죽는다는 사실에 슬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기회를 부여 받은 게 얼마나 놀라운 행운인지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인생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 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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