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충동을 넘어서
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 문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하다.
종교는 갈등의 원천이 아니라 평화를 앞당기는 힘이 될 수 있느냐?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긴밀하게 상호 연결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차이 때문에 위협감을 느끼는 대신 자신이 커진다고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6)
그 답은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가 어떠한 방법으로 '타자'를 위해 공간을 내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6)
chapter 01서문: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나는 종교가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주는지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또한 유대교가 두 가지의 언약(대홍수 이후에 인류 전체와 맺은 노아 언약, 시나이 산에서 한 민족과 맺은 모세 언약)을 통해 통해 보편(인간으로서 우리가 공유하는 의무와 권리)에 대한 관심과 특수(우리에게 독특한, 비보편적인 정체성을 부여해서 우리를 저 민족이 아니라 이 민족으로 만들어주는 고유한 규범과 관습, 이야기와 전통)에 대한 존중을 어떻게 조화시키려고 했는지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7)
커뮤니케이션 경로(이메일, 인터넷, 온라인 잡지, 수많은 유선 또는 위성 TV 채널 등)가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브로드케스팅broadcasting하지 않는다. 우리는 내로우캐스팅narrowcasting할 뿐이다.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공론의 장을 공유하고 그러하기에 상대방을 직접 만나서 논쟁하고 설득해야 했던 시절은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와 의견이 같은 사람들만을 상대하고 다른 목소리는 걸러낸다. (16)
'서로 변론한다reasoning together'는 생각은, 도덕적 언어가 붕괴하고 '나는 해야 한다'는 어법이 '나는 원한다', '나는 선택한다', '나는 느낀다'는 어법으로 바뀐 20세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의무는 우리가 서로 논쟁할 수 있는 사안이지만, 욕구나 선택, 감정 등은 옳고 그름을 따질 만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냥 만족하거나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17)
세계화 시대와 종교의 역할
"종교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히 많지만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기에는 부족하다." (조나단 스위프트) (19)
문명의 대화
정체성 정치의 시대
반면에 적이 악수를 청해 올 때는 누가 '우리'이고 누가 '그들'인지 분명하지 않다. 평화는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수반한다. 자아와 타자, 친구와 적의 경계를 다시 그어야 한다. 그러므로 헨리 메인 경이 지적한 것처럼, "전쟁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평화는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말도 그닥 놀랍지는 않은 것이다. (26)
갈등과 투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를 끌어들일 때 모름지기 종교인이라면 반대 목소리를 더욱 분명히 해야 한다. (28)
분명히 말하건대, 종교가 그것이 해답의 일부가 되지 않으면 문제의 일부가 될 수 밖에 없다.
아직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 세상에서 평화란 신앙이 다르고 경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는 너무나 자주 '우리의 관점에서 보는 평화'였다. (29)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정치가 압도했던 시대였지만, 오늘날 우리는 정체성 정치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이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우리가 맞이한 커다란 변화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종교가 오랜 쇠퇴기를 거쳐 다시 등장하고 세계무대에 위압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만큼 정체성 문제에 대해 민감한 해답을 해주는 것이 별로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점이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정체성은 쪼개고 분리하는 것이다. '우리'를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는 '그들', 즉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29, 30)
종교의 도덕 원리
문제는 자유 민주주의가 도덕적 고려를 도외시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실제로 서양 정치가들은 예전보다 더욱 절차적이고 관리적인 태도를 가졌다. (32)
그러나 각 나라의 정부는 공익(공공선, common good)이라는 이상을 법제화하는 데 점점 더 미적거리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듯 모두가 공유하는 선은 근거가 박약한 개념인 까닭이다. 그만큼 우리의 차이는 엄청나다. 결국 개인들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를 주는 게 최선의 길이고,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살 수 있는 규제 없는 시장이야말로 그 길에 이르는 최고의 수단이 되고 말았다. (32)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제가 사는 도시 국가와 부족과 나라를 뛰어 넘어 인류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처음 가르친 것이 종교였다. (34)
차이가 가치의 원천, 아니 사회 자체의 원천이라는 논지에 핵심이 되는 사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도 하나의 제도가 본래의 경계를 뛰어넘어 자기와 논리나 동력이 다른 주변 영역을 식민화할 때는 위험하다. 중세 시대에는 종교가 그런 경우였다. 18세기에는 과학이 그러했고 19세기와 20세기에는 정치가 그러했다. 21세기에는 시장이 그렇다. 화폐교환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의 거래에 대해서만 적합한 기제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가족이나 공동체, 교단, 자발적인 모임 등 경제적 계산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인간관계이다. 이런 관계들은 시민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집단이지만, 소비 위주의 사회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39)
경제체계는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 인간에게서 체계적으로 존엄성을 앗아가는 체제는 옹호할 가치가 없다. 세계 시장을 버리자는 얘기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우리의 결정에 중요한 요인으로 취급되어야 하는 일련의 비시장적 가치들을 좀더 진지하게 고려하자는 뜻이다. (41)
대화의 기술
과연 우리는 인간(적)인 '너'에게서 신(적)인 '당신'의 일부를 인식할 수 있을까? 우리와 모습이 다른 자에게서도 하느님의 형상을 볼 수 있을까? (42)
나는 정통 유대교도이다.
최근의 세계 주요 종교의 부흥은 자유주의적 신앙보다는 보수적인 신앙 위주로 이루어졌다. 보수적인 종교 운동의 힘은 후기 현대성에 순응하지 않고 그것에 저항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가 낳은 부작용에 대한 깊은 환멸을 표현하고 있다. 그 부작용이란 불평등, 소비주의, 착취, 만연한 빈곤과 질병에 대한 대처 능력 부족,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무시하는 구제불능의 둔감함, 그리고 물질적 풍요와 나란히 가는 영혼의 빈곤함 등이다. 오늘날 열성 신도들을 끌어 모은 것은 현대적인 모습의 종교가 아니라 반현대적인 모습의 종교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관용과 공존, 비폭력을 위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43)
내가 알고 존경했던 만년의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 경은 훌륭한 에세이 '자유의 두 개념Two Concepts of Liberty'에서 자유주의적 신조의 핵심을 이제는 유명해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 바 있다. "자기 신념의 상대적 타당성을 깨닫는 동시에 자기 신념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야만인과 구별되는 문명인의 태도이다." 이는 대단히 고귀한 감정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가인 마이클 샌들Michael Sandel은 이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신념이 상대적으로만 타당하다면 그것을 끈질기게 옹호할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널리 반향을 얻은 물음이었다. (43, 44)
나는 3장에서 플라톤 시대 이후로 서구의 - 종교적인 그리고 세속적인 - 사상을 지배한 특정한 패러다임이 잘못된 것이며 매우 위험한 것이라는 혁명적인 주장을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진리나 궁극적 실재를 찾기 위해서는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이에 따르면, 특수성은 불완전한 것이고 오류와 편협과 편견의 원천인 반면, 진리는 추상적이고 시간을 초월하며 보편적이고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45)
이제는 우리가 플라톤의 유령을 깨끗이 몰아낼 때다. 지역적이고 특수하고 독특한 것에 대한 존중으로 보편주의의 균형을 잡아주어야 한다. (47)
창조된 세계의 영광은 그 놀라운 다양성에 있다. 인류가 사용하는 수천가지 언어들, 다양한 문화, 인간 영혼에 대한 각가지 표현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지혜의 목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내가 차이의 존엄이라는 말로 뜻하는 바가 이것이다. (48)
그러나 갈등의 시대에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그런 공통성이나 유사성이 아니다. 그 때에는 국외자에게는 사소한 차이로 보이는 것이 엄청난 의미를 띠면서 이웃을 분열시키고 예전의 친구를 적으로 만든다. 프로이트는 이를 두고 '작은 차이의 나르시즘'이라고 불렀다.(The narcissism of small difference. 프로이트가 1917년에 '처녀성의 금기'라는 논문에서 사용한 용어. 우리는 우리와 가장 닮은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 아주 작은 차이만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증오와 적의를 느낀다는 의미이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차이점이라 해도 정체성의 표지, 그래서 서로를 소원하게 하는 특징으로 변한다. (48, 49)
흔히 하느님은 한 분이기에 구원에 이르는 길도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유일신 신앙의 중심 교회는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유일성은 다양하게 숭배된다는 게 맞다(48).
복잡성이야말로 그것들에게 예측이 불가능한 창조성을 부여하는 특징이다.
우리의 이야기와 심각한 충돌을 빚을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어야 하며, 때로는 그들의 고통과 모욕감과 원한을 귀담아 들을 줄도 알아야 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대화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51)
우리는 보편이 아니라 특수에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 보편적인 문명이 서로 충돌하면, 세상이 흔들리고 많은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51, 52)
chapter 02세계화 속의 불만
반면 "오늘날에는 변화의 시간이 한 사람의 일생보다 짧고" 앞으로는 더욱 짧아질 것이다. ... 변화는 우리네 삶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가 되었고, 그런 끊임없는 변화와 불확실성을 견디고 오래 지속될 만한 것은 세상에 별로 없다. (56, 57)
하나는 이미 죽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 태어날 만큼 힘이 없는 두 세계 사이에 끼어있는 처지이다.
현 상황의 특이성은 우리가 공통의 미래로 나아갈 길을 찾기 힘들 만큼 변화가 너무 빨리 진행된다는 데 있다. 기술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지만 우리의 도덕적 신념은 점점 더 갈피를 잃고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57)
평균적인 북미인은 멕시코인보다 다섯 배, 중국인보다 열 배, 인도인보다는 서른 배 정도를 더 소비한다. 세계 인구의 33%인 13억 명이 빈곤선(poverty line)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다. 8억 4천 1백만 명이 영양 불량이고 8억 8천만 명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다(61).
소수의 엄청난 부는 다수의 비참함과 날카롭게 대비되면서 우리의 정의감을 거슬리고 있다. (61)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우리의 관심이 가족에서 이웃, 사회, 세계로 나아갈수록 공감의 강도가 줄어든다고 지적한 바 있다. (63)
시장의 지배
서양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예외 없이 가족과 공동체가 쇠퇴하고 있고, 빈곤의 집중화와 사회의 붕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64)
요셉 슘페터 1947
자본주의는 다른 많은 제도의 도덕적 권위를 파괴하고 궁극에는 자본주의 자체의 도덕적 권위마저 파괴할 비판적 정신을 키워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의무와 책임, 절제 등에 관해 말할 능력을 상실하고 만족만을 바라는 욕망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때 공공선에 관해서 말하기란 더욱 어려운 법이다. (66)
의무와 책임, 절제 등에 관해 말할 능력을 상실하고 만족만을 바라는 욕망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때 공공선에 관해서 말하기란 더욱 어려운 법이다. (66)
많은 사람들은 다원적이고 다문화적으로 변한 사회에서 더 이상 공공선에 대한 합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정부는 '선'에 대한 공동의 결정을 내릴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결정은 이제 개인의 선택과 양심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국가와 시장이라는 가장 영향력이 큰 두 제도(행위자)는 결정 과정에서 차지하는 윤리적인 차원을 효과적으로 배제했다. (68, 69면)
오늘날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상위 100대 경제 단위 가운데 51개는 기업이고 49개는 국민국가이다. (69면)
오늘날의 글로벌 엘리트들은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 별다른 교섭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들과 같은 나라에 살지도 않는다. 자신들의 상품을 사는 사람들, 특히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사람들과도 거의 접촉이 없는 편이다. 이는 중요한 문제이다. 도덕적 책임은 단지 추상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사이에서 움터나온다. 그런 관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고 이 과정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는 것이다. 현대 생활의 비인격화와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우리에게서 행동과 결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앗아갔고 이는 우리의 도덕감을 약화시켰다. (69, 70)
현대 생활의 비인격화와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우리에게서 행동과 결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앗아갔고 이는 우리의 도덕감을 약화시켰다(70).
문명의 충돌
시장은 사회의 일원을 공통 일원으로 맺어주는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와 같은 유대 관계를 파괴했고 지금까지 우리가 '나는 원한다'와 '나는 해야 한다' 사이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했던 도덕적 담론을 무력화했다. 시장은 집단적 의무로 묶인 위계제hierarchy를 개인적인 생활방식과 취향을 누리는 슈퍼마켓으로 대체함으로써 공공선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허물었다. (71)
윤리:
인간의 감정(흄)이든
합리성(칸트)이든
혜택의 극대화(벤담) -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
지식은 전통과 권위가 아니라 이성과 관찰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은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다. 코페르니쿠스와와 갈릴레오, 특히 뉴턴은 사회 전체가 따라야 할 새로운 인식론의 전범이 되었다. 이에 따르면 실험은 진리를 구성할 것이고 이성은 편견을 몰아낼 것이다. 윤리는 이제 인간의 감정(흄)이든 합리성(칸트)이든 혜택의 극대화(벤담)이든 새로운 토대를 기반으로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이라는 개념은 진보라는 새롭고도 강력한 이념으로 진화했다. (72)
종교의 부활
세계 시장은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다. (77)
우리는 유일하게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며 ‘나는 어떤 이야기에 속하는가’이다. 경제가 정치를 대처할 수 있고 사적 선택이 공공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상상력의 가장 원대한 희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경제 자체는 ‘누구’와 ‘왜’라는 커다란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거기에 대답을 준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오늘날 종교가 갖고 있는 힘이 있다(79).
이데올로기 정치는 아마도 죽고 말겠지만, 그것을 대체한 것은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정체성 정치다. (79)
20세기의 커다란 비극은 정치가 종교화되었을 때, 국가(파시즘)나 이론체계(공산주의)가 절대화되고 신격화되었을 때 생겨났다. 21세기는 반대 상황이 발생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즉, 정치가 종교화될 때가 아니라 종교가 정치화될 때다. 종교는 정치가 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공화국을 비판한 근거였다. '국가'에서 플라톤은 국가에 종교의 성격을 부여하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차이가 없다면 정치도 있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정치는 종교가 극복하려고 하는 것, 즉 의견의 다양성, 상충하는 이해관계, 복수성 등이 자리잡은 공간이다. (82)
생각은 세계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think globally, act locally (82)
chapter 03차이의 존엄: 플라톤의 유령 몰아내기
이사야 벌린의 말을 빌면, 거창한 역사적 이상의 제단에 개인들을 희생한 책임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신념이다. 나와 신앙(혹은 인종이나 이데올로기)이 다른 자들은 나와 똑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신념 말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이등 시민일 뿐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생명의 거룩함을 박탈당해 마땅한 존재이다. (86)
위대한 종교는 열성 신자들에게 의미와 목적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종교는 신자가 아닌 사람들, 다른 노래를 부르고 다른 음악을 듣고 다른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공간을 내줄 수 있을까? 바로 이 질문에 21세기의 운명이 걸려 있을 것이다. (83)
- 플라톤의 유령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른손을 바닥으로 향하고 있는 반면,
플라톤은 오른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이데아의 세계에서 차이는 동일성으로 융해되고 특수는 보편에 굴복한다. (92)
내 주장은 보다 근본적이다. 즉, 보편주의는 부족주의에 대한 부적절한 반응이며 부족주의 못지않게 위험하다. 보편주의는 겉으로는 매력적이지만 결국 그릇된 믿음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 조건의 본질에 관한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그 진리가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 대해 참이라는 믿음이다. 이에 따르면 내가 옳다면 너는 그른 것이며, 내가 믿는 게 참이면 네가 믿는 것은 거짓이며, 너는 그 거짓 믿음에서 빠져나와 구제받아야 한다. 역사의 참극은 이런 생각에서 생겨났다. (93)
- 최초의 세계화
성경은 보편적인 인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그 다음에야 특정한 남자인 아브라함과 특정한 여자인 사라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한 민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반적인 순서를 뒤집고 보편에서 특수로 이어지는 여정을 택한 성경은 서양 문명에서 반플라톤적 서사를 대표한다. (94)
- 인간의 보편성과 문화의 특수성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형제들의 싸움에 고통을 느끼듯, 하느님도 자식인 우리에게 서로 싸우거나 지배하려 들지 않기를 바란다. 다양성의 창조주인 하느님은 다양성 안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103-104).
- 인간의 연대성
도덕적 배려의 보편성은 우리가 보편적인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게 아니라 특수한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것이다. 이는 부모가 되어 내 아이를 사랑할 줄 알게 된 다음에야 제 자식을 사랑하는 다른 부모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 우리는 특정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지름길은 없다. (106, 107)
- 타자성의 용인
성경 윤리의 독특함은, 인간의 상호 대면의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로 정평이 난 문제를 다루는 부분에서 가장 표나게 드러난다. 그것은 이른바 이방인, 즉 우리와 닮지 않은 사람에 관한 문제다. (107)
대신 성경은 역사를 언급한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너희는 다르다는 게 무엇인지 안다. 너희 역시 한때는 다르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108)
그것은 차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109)
- 차이의 관용
역사적으로 유대교는 제국에 대한 살아있는 대안이었다. 제국주의와 그 계승자인 전체주의와 근본주의는 다수성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하나의 체제를 강요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110).
세상에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있다_벤자민 바버
- 천국의 진리와 지상의 진리
현인들은 말하길, "현명한 자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가장 현명한 자는 남들보다 현명한 자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지혜의 몫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그들에게서 기꺼이 배우려는 자이다. 진리를 모두 아는 사람은 없고 우리들은 저마다 진리의 일부만을 알기 때문이다. (117, 118)
chapter 04통제: 책임의 의무
마이모니메스는 "인간은 본성상 그에게 익숙한 것을 갑자기 버릴 능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124, 125)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생물종과 다른 점은 우리의 행동이 유전자가 아니라 문화에 의해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진다는 점이다. (125)
- 사회제도의 붕괴
변화 자체가 체계화되었다. 변화는 더 이상 변하지 않는 틀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더 중요한 점은 우리가 더는 우리의 삶을 통제한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 ... 이 거대한 힘에는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행위자agent가 존재하지 않는다. (128)
포스트모던 시대의 은유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나 혼돈 이론, 재귀성 이론인데, 이들 모두는 예측불가능성과 불확실한 결과를 강조한다. (129)
- 선택과 책임
사회구조, 경제력, 역사적 불가피성, 유아기의 조건
스피노자 -진정한 자유는 필연성의 인식
마르크스- 계급의 정반합
뒤르켐- 사회현상/ 자살
프로이트 - 행동이면의 비합리성 본능
사회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변화를 기술하였는데, 신분에서 계약으로, 공동사회Gemeinschaft에서 계약사회Gesellschaft로, 공동체에서 사회로, 명예에서 존엄성으로, 운명에서 선택으로 등이 그것이다. (133)
시장이 교환의 매커니즘이 아니라 인생의 지배적인 매커니즘이 되면, 의미 자체가 허물어진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상적인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순례자'에서 '여행자'로 변한 것이다. 사회는 점차 가정이 아니라 호텔을 닮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 상태, 아무에게도 진실한 애정을 갖지 않고 어느 누구의 진실한 애정도 받지 않는 상태, 아무와도 운명을 공유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영속적인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상태에 접근하고 있다. (135, 136)
- 도덕성의 의미
- 대화의 미덕
선(善)과 도덕적 가치와 거룩함에 대한 공동의 판단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종교가 되살아난 이유일 것이다(144).
- 책임의 윤리
인간의 존엄함을 최대한 증진하는 경제체계를 선택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152)
chapter 05공헌: 시장 경제의 도덕
인간은 시장에 봉사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시장이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154)
시장은 부의 창출에는 능하지만 부의 분배에는 서툴다. 시장은 어떤 덕목은 장려하지만 다른 덕목은 허물어뜨린다. 시장이 초래하는 사회적 결과는 언제나 자애로운 것은 아니며 때로는 매우 비참하다. 우리가 아는 한 시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 수단으로는 가장 좋다. 그러나 시장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거나 - 가격과 일치하는 것이 아닌 - 가치를 보존하는 최선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 (155)
모든 '이다' 너머에는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과학, 정치, 경제의 어떤 체계도 단지 존재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스스로 정당화되거나 승인받을 자격이 있는 건 아니다. (157, 158)
- 자본주의 정신
이 끊임없는 이기적 충동은 도덕의 동맥경화증을 유발한다. (160, 161)
- 재산권과 경제적 독립
수메르의 왕들이나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신 혹은 신의 대리인이었다. 히브리 성경의 새로운 면은 어떤 한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점이다. (162)
- 노동의 가치
- 리세즈 오블리주
- 희망의 경제학
chapter 06자선: 사회 정의
데이비드 리카도 - 비교우위론
네가 나보다 도끼머리를 더 잘만드는 경우에도 물고기 잡는 일을 도끼머리 만드는 일보다 잘하고 나는 물고기 잡는 일보다 도끼머리 만드는 일을 더 잘한다면, 사정은 마찬가지임을 보여주었다.
우리 각자가 다른 일보다 더 잘하는 일이 있는 한, 남이 나보다 그 일을 더 잘하는 경우에도 거래는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혜택을 본다.
모세의 가장 큰 관심은…극도의 가난과 모욕적인 궁핍을 전혀 모르는 사회를 만드는데 있었다 -헨리 조지, <모세>-(182).
투자 자본은 인간에게 미치는 결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최대한의 이익만을 쫓아 나라에서 나라로 움직인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해마다 평등에서 멀어진다. (183)
학교나 위생 설비 없이 살아가는 20억 명에게 그것들을 제공하는 비용보다 미국인은 화장품에, 프랑스인은 아이스크림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 (184)
서양의 겨우 네 나라(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네델란드)만이 유엔이 목표로 정한 국민소득의 0.7퍼센트를 해외 원조에 쓰고 있을 뿐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인 미국은 겨우 0.1퍼센트만을 쓰고 있다. 선진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184, 185)
- 보이지 않는 손의 맹점
경제적 박탈은 사회적 빈곤과 나란히 가는 게 보통이다. 우울한 이웃, 위축된 지역공동체, 높은 범죄율, 약물 거래, 낙제와 유급, 사회복지시설 전전 등. 오늘날 저개발국은 물론 세계 최부국의 황폐한 도시 주변에서도 너무나 많은 어린이들이 아무런 희망 없이 자라고 있다. (186)
경제 자유화는 강한 자는 더욱 강하게, 약한 자는 더욱 약하게 만들 수 있다. (188)
다국적 기업은 정의를 추구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189)
여기서 권리 개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권리가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그것을 이행할 수 있는 법체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건 마치 돈을 인출할 수 있는 은행과 계좌가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수표와 같다. (192)
- 체다카와 미쉬파트
창세기 18장 17-19절 ... 여기서 두 단어, 체다카(정의)와 미쉬파트(공의)는 정의의 다른 측면을 의미하고 있다. 미쉬파트는 응보의 정의 혹은 법규를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자유로운 사회는 공명정대하게 집행되는 법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 죄인은 처벌을 받고 죄 없는 이는 풀려나고 인권은 지켜져야 한다. 반면 체다카는 더 실질적이고 덜 절차적인 개념인 분배의 정의를 가리킨다. (194)
- 채무 면제의 의미
- 베풂의 가치
자존감을 지키는 데 필요한 한 가지는 독립성이다. ... 어려운 사람을 자립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체다카의 가장 위대한 면이다. (204)
- 존엄함의 평등
- 체다카의 교훈
지그문트 바우만은 세계화는 "통합시키는 만큼 분열시킨다. ... 일부에서는 새로운 자유의 깃발이지만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잔혹한 운명일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209)
chapter 07창조성: 교육의 책무
앞 장에서 나는 체타카(유대교가 이해하는 사회 정의)의 정신을 따르면 자존감과 독립심을 세워주는 방식으로 빈곤을 완화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212)
종교가 지배한 중세에는 시간조차 종교에 저당잡혀 있었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이미 신성한 문헌에 예고된 일이었다. (216)
- 문자의 탄생
- 알파벳의 발명
- 교육의 힘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보조금을 지급하는 브라질의 볼사 에스콜라Bolsa-Escola 정책은 모범적인 사례다. 덕분에 브라질에서 학교에 가는 아동의 비율이 97%로 증가했다(234).
chapter 08협동: 시민 사회와 그 제도
- 죄수의 딜레마
- 계약과 언약
존 폰 노이만 - 게임이론
각자가 이기심을 추구할 때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가 나온다는 전제 조건에 도전한다. 죄수의 딜레마는 두 사람이 모두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만 둘 다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다.
생존의 개인의 힘보다는 협동에 의존한다.
그러나 20세기의 위대한 지적 성과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나'가 허구이며 적어도 추상 개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힌 점이다. 사회학자 조지 허버트 미드George Herbert Mead는 우리는 오직 '의미있는 타자', 무엇보다도 부모와의 친밀하고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만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250)
이러한 개인의 정체성은 언약이라는 개념 이면에 존재한다. 언약은 이해관계나 이익에 따라 묶인 유대 관계가 아니다. 언약은 소속감으로 묶인 관계다.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우리'를 이룰 때 언약이 맺어진다. 언약은 제한이 없고 영속적이라는 점에서 계약과 다르다. 언약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헌신의 의미를 수반하며, 어려운 상황에도 곁에 있어 주는 신의의 개념을 내포한다. ... 언약의 가장 간단한 사례는 결혼이다. 또 다른 사례는 우정 어린 관계다. (251)
- 신뢰의 퇴조
-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위하여
위대한 세계종교의 힘은 그것이 단순한 철학 체계, 다시 말해 엄격한 논리적 구성에 따라 꿰어 맞춘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나온다. 위대한 세계종교는 삶과 가정, 회중, 의식, 이야기, 노래, 기도 안에, 경제적 힘에 굴복하지 않는 언약의 공동체 안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구체적인 진리다. (262)
용서는 본래 종교적 덕목이다. 자연에는 용서라는 게 없다. 자연의 힘은 맹목적이고 자연의 법칙은 냉혹하다.
chapter 09보존: 지속 가능한 환경
- 사람은 자연의 주인이자 하인이다.
- 안식의 의미
- 자연의 권리
히르쉬가 책을 쓰던 무렵, 영국계 유대인 루이스 곰퍼츠는 선구적으로 동물권animal rights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활동은 훗날 왕립 동물 학대 방지 협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우리 시대에 이 문제를 가장 열심히 주창한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영국 국립 도서관에서 곰퍼츠의 저작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그가 "150년 전에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지적했다. (278)
- 종교 전통에서 배우는 환경 윤리
-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도덕적 이상이 없다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공유해야 할 도덕적 이상은 오직 대화를 통해서만, 계급과 수입과 인종과 신앙의 경계를 넘어 서로 이야기하고 귀를 기울이는 과정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다(288).
chapter 10화해: 세상을 바꾸는 용서의 힘
- 관대한 팃포탯
- 다섯 가지 용서
- 정의와 용서
- 용서와 화해
chapter 11희망의 언약
- 종교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
- 근본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
- 언약이란 무엇인가
언약은 지배나 종속 따위가 없는 동반자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의무를 지우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위대한 철학자 J.L. 오스틴Austin은 그런 언어를 수행적 발화performative utterance라 하였다. (331)
- 희망의 언약
언약은 계약이 아니다. 그것은 세 가지 점에서 계약과 다르다. 첫째, 언약은 특정한 조건과 상황에 제약되지 않는다. 둘째, 언약은 한계가 없고 오래 지속된다. 셋째, 언약은 다른 면에서는 서로 관련이 없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두 개인의 만남이라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언약은 '나'에게 정체성을 주는 '우리'에 관한 것이다. 계약에는 그것을 맺는 장소가 선행하지만, 언약은 무엇보다 우선적이고 무엇보다 근본적이다. 그것은 계약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인 상호성의 모형이다.(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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