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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 장 폴 사르트르

by mubnoos 2021. 7. 1.

『구토』는 연금 생활을 하는 주인공 로캉탱이 롤르봉 후작이라는 인물의 자료를 찾기 위해 도서관에서 18세기 인물을 정리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사는 곳은 부빌, 카페를 찾아 마담과 육체관계를 갖거나 '머지않아서'라는 노래를 듣는 것이 전부인 매우 고독하고 무료한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아이들의 물수제비 뜨기 놀이를 흉내내려다 알 수 없는 생각에 빠져드는데, 그것이 지속적으로 그를 괴롭힌다. 그것은 사물과 직면할 때마다 일어나는 '구토증'이었다. 그는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일기를 쓴다. 1932년 1월 말부터 약 한 달 동안의 일기가 이 책의 내용이다.

 

주인공인 서른 살의 앙투안 로캉탱은 수년간의 여행 끝에 부빌이라는 프랑스 항구 도시에 정착한 연구원이다. 그러나 정착이라는 과정은 일련의 괴상한 효과를 낳는다. 로캉탱이 지극히 단순한 일상적 행위에 직면할 때마다, 세상과 그 속에서의 그의 위치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는 존재의 합리적인 견고함을 깨지기 쉬운 한 겹의 껍질로 인식한다. 그는 현실의 메스꺼움, 달콤한 역겨움, 원시적인 단계의 현기증을 경험한다. 그는 무생물의 공허한 무관심에 경악하지만, 그가 처하는 각각의 상황이 그의 존재에 돌이킬 수 없는 날인을 찍는다는 것을 날카롭게 인식한다. 그는 스스로의 압도적인 실재에서 탈출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 이 작품은 자유와 의무, 의식, 그리고 시간을 섬세한 절제로 탐구하고 있다. 에드문트 후설의 철학과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의 문체의 영향을 받은 『구토』는 20세기 사상과 문화의 가장 중대한 성장이 된 실존주의를 세상에 선언한 소설이다.
  • 자기 자신을 포함한 사물의 "우연성" "비정립적으로포착할 때의 "전신감각적인 기분"을 의미한다.
  • 사르트르가 말하는 <구토> <구역질>이라고 하더라도 추악한 것을 앞에 둔 경우 등에서 우리가 자주 느끼는 생리적인 메슥거림과 같은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구역질과 같은 것이 아니다.
  • 사르트르의 『구토』는 문학사상 매우 희귀한 작품이다두 가지 노력에서 모두 성공한 “철학소설로실존주의 철학 선언인 동시에 예술에 대한 설득이다사실 이 작품에서는 문학과 철학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질 정도이다.

 

 

 

1. 날짜 없는 쪽지

  • 최선의 방법은 그날그날 일어난 일들을 기록해 두는 일일 것이다. 정확하게 관찰하기 위하여 일기를 적을 것,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 느낌이며 사소한 사실들을 놓치지 않을 것과, 특히 그것들을 분류할 것. 내 자신이 어떻게 보는가를 써야만 한다. 왜냐하면 변한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범위와 성질을 명확하게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 일기를 쓰면 다음과 같은 위험이 있을 것 같다. 즉, 모든 일을 과장하는 것, 너무 날카롭게 주의를 기울이는 나머지 줄곧 진실을 왜곡하게 되는 것이다. 
  • 표면적으로는 그뿐이었다. 내 마음 속에 일어난 것이 명백한 어떤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다. 나는 그 무엇을 보았고 그것이 나에게 혐오를 일으켰던 것이다.
  • 나는 공포심 비슷한 감정으르 가졌던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었던가, 그것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벌써 많이 진보했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내가 나 자신을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확신까지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물체에 관한 변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그것이 내가 확실히 알고 싶은 점이다.

 


2. 일기

(1932년 1월 29일 부터 약 한 달간)

  • 그 무엇인가가 나에게 일어났다.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늘 있는 어떤 확신이라든지 명백한 일처럼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마치 병에 걸리듯이 닥쳐왔다. 그것은 조금씩 음흉하게 자리를 잡아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나 자신이 조금 기이하고 어색한 느낌을 가졌다. 그뿐이다. 한번 자리를 잡더니 그것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히 놀란 것 뿐이라며 자신을 타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또 꽃잎을 열었다.
  • 지난 몇 주일 동안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 그것은 아무 곳에도 근거를 두지 않는 추상적인 변화다. 내가 변한 것일까? 내가 변하지 않았다면, 이 방이, 이 도시가, 이 자연이 변한 것이다. 그 중의 어느 쪽인가를 가려내야 한다.
  • 변한 것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이다. 그러나 가장 불쾌한 해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은 내가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지배되어 있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사실 나는 생각을 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자질구레한 변화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 안에 쌓였다가 어느 날 혁명과도 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생활에 그 돌변하는 그리고 일관성 없게 양상을 띠게 만드는 것이다.
  • 나는 마비된 듯, 단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 눈 앞의 불상이 문득 불쾌하고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가 심각한 권태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왜 인도차이나에 와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이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왜 나는 이런 괴상한 옷을 입고 있는가? 나의 정열은 사라져 버렸었다. 그 정열은 몇 년동안 나를 뒤덮어 휘몰아왔던 것이다. 이제 나 자신이 텅 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혹한 일은 내 앞에 거대하고 무의미한 하나의 관념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것은 너무나 불쾌감을 일으켰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제대로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 내 생각이 옳다면, 또 쌓여 가는 모든 징조가 내 삶의 새로운 파괴의 예고라면, 정말 나는 두렵다. 나의 생활이 풍족하다든지, 만족스럽든지, 귀중하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생겨나려고 하는 것, 나를 사로 잡으려는 것, 그것이 두렵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가?
  • 그들도 존재하기 위해서는 끼리끼리 서로 어울려야만 한다.
  • 나는 혼자서, 아주 혼자서 살고 있다. 절대로 아무에게나 말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받지 않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 제각기 자리를 위해서 하는 짓이다. 
  • 말은 내 마음 속에서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붙잡으려 하지 않고 가만히 놓아둔다. 내 생각은 대개의 경우, 말에 연결되지 않았기 떄문에 안개처럼 머물러 있다. 어렴풋하고 재미난 형상을 그렸다가는 지운다. 나는 이내 그런 것을 잊는다.
  • '고독의 한계'를 그어 놓을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 나도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역시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보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다.
  • 새로운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이란 진실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얼마나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경탄해 마지 않는다. 분명히 새로운 일이란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 무릇 물체들, 그것들이 사람을 만져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고 그것을 정리하고 그 틀에서 살고 있다. 그것들은 유용한 것일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나를 만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참을수가 없다. 
  • 그렇다.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손아귀에 담긴 그 일종의 구토 증세.
  • "바람이라도 피우는 편이 더 나을지는 모르겠어요. 몸에 해롭지만 않다면야 아무려면 어때요."
  • 내 얼굴이 반사된 것이다. 별로 하는 일이 없는 날이면 가끔 나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 얼굴에서 나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다. 타인의 얼굴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내 얼굴에는 그것이 없다. 자신의 얼굴이 잘생겼는지 추한지를 판단할 수조차 없다. 추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으니까 못생겼을 게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사실은 사람들이 흙덩이를 보고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말하듯이, 그러한 종류의 형용사를 내 얼굴에 부여하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 나는 친구가 없다. 내 몸이 그렇게도 적나라한 것은 그 때문일까? 그런 것 같다. 그렇다. 마치 인간에게서 떠난 자연이라고나 할까.
  • 이제 난 일하기 싫다. 밤을 기다리는 수밖에 아무 할 일이 없다.
  • 그 때 구토가 치밀었다. 나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내 둘레를 여러 가지 색채가 도는 것을 나는 보고 있어싸. 나는 토하고 싶었다. 그렇다, 그 때부터 구토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 그것이 나를 붙들고 있다.
  • 시간은 너무 넓어서, 채우도록 가만히 있지 않는다. 사람이 시간 속에 던져 넣는 것은 모두 물컹물컹해져서 뻗어 버린다. 
  • 그것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용납해야 하며, 그 소멸을 내가 차라리 바라기까지 해야 할 것이다.
  • 강인한이란 것이 그렇게도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야릇하고 감동적인가. 그것을 중단시킬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것을 파괴해 버릴 수도 있다.
  • 구토가 저기 노란 불빛 속에 남아 있다. 나는 행복하다. 이 추위는 그렇게도 순수하며 이 어둠 또한 그렇게도 순수하다. 나 자신이 얼어붙은 공기의 한 줄기 흐름이 아닐까?
  • 나는 미래를 본다. 미래는 길 위에 놓여 있어, 현재보다도 약간 희미할 뿐이다. 미래가 실현되어야 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실현되어 보았자 무엇이 더해진단 말인가?
  • 무엇인가가 시작되지만 그것은 곧 끝나기 마련이다. 모험은 연장되지는 않는다. 모험은 그 자체가 사멸됨으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사멸을 향해, 나는 되돌아오지 않고 끌려간다. 순간순간은 그것을 이어오는 순간을 이끌기 위해서 생겨난다.
  • 산다는 것이 그렇다. 그러나 사람이 삶을 이야기할 때에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 다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그 증거로는, 사람은 정말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사실 같은 이야기가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사건은 한 방향에서 생기고 우리는 그것을 그 반대의 방향으로 얘기한다.
  • 결말이라는 게 있어서 모든 것을 변형시킨다.
  •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묘사할 줄 모른다. 그것은 마치 구토 같은 것이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여간 어떤 모험이 나에게 생긴다. 스스로 자문을 할 때, 나는 나이며 나는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 모험의 감정은 확실히 어떤 사건으로부터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미 증명됐다. 모험이란 차라리 순간이 서로 얽히는 그 방법에서 생긴다. 아마도 이러하리라고 생각된다. 즉 갑자기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것, 또 한순간이 다른 순간에 이어지며, 그 순간이 또 다른 순간에 그런 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매 순간은 사라지고, 그것을 붙잡아 두는 게 어리석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사건에서 이 특징의 원인을 찾는다. 다시 말하면, 형식에 관련된 것을 내용에 연관시켜 버리는 것이다.
  •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 나는 내 손을 느낀다. 그것이 나다. 내 팔 끝에서 움직이고 있는 두 마리의 짐승이다. 내 손은 한쪽 발로 다른 발을 긁는다. 나는 내가 아닌,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의 무게를 느낀다. 그 무게의 인상은 아주 오래 계속된다. 사라지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라질 이유가 없다. 점점 견딜 수 없다. 나는 손을 잡아당겨서 호주머니에 넣는다. 그러나 이내, 나는 옷감을 통해서 허벅지의 체온을 느낀다. 곧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의자 등받이에다 걸쳐 놓는다. 이제는 손의 무게를 팔 끝에서 느낀다. 손이 슬며시 물렁물렁하게 늘어진다. 손은 존재한다. 나는 고집하지 않는다. 내가 손을 놓는 곳에서 손은 그의 존재를 지속할 것이고 나는 손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것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내 육체의 나머지 부분을, 내 셔츠를 더럽히고 있는 그 축축한 체온을, 마치 스푼으로 휘젓고 있는 듯이 시름시름 돌고 있는 저 뜨거운 지방덩어를, 그리고 그 속에서 왔다갔다하고 있으면서 옆구리에서 겨드랑이로 내왕하거나 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은 장소에서 생장하고 있는 그 모든 감각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 나는 벌떡 일어선다.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만 있어도 살 것 같다. 생각이라는 것들, 그것보다 무미건조한 것은 없다. 육체보다 더 무미건조한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뻗는다.그리고 이상한 맛을 남긴다.
  • 나는 존재한다는 일종의 괴롭도록 되씹는 생각, 바로 내가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 바로 나다. 육체는 한 번 태어나면 혼자서 살아간다. 그러나 생각은 바로 내가 지속시키고, 내가 전개시킨다. 나는 존재한다.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 생각하기 싫다. 생각하기 싫다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도 하나의 생각이기 떄문이다. 그럼 영원히 끝이 없지 않은가?
  • 내 생각, 그것은 나다. 그래서 나는 멈출 수가 없다.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하기를 단념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것은 무서운 일이다. 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기를 내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갈망하고 있느느 저 무로부터 나 자신을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나, 나다. 존재하는데 대한 증오, 권태, 그것이 나로 하여금 존재시키는 방식이며, 존재속에 나를 밀어 넣는 방식인 것이다. 생각은 현기증처럼 내 뒤에서 피어나고, 나는 그것이 내 머리 뒤에서 피어나는 것을 느낀다. 만약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것은 앞으로 내 두 눈 사이로 다가오려고 한다. - 계속해서 그대로 내버려 두면 생각은 커지고 커진다. 그리하여 드디어 나를 가득채우고 내 존재를 새롭게 하는 무한한 것이 있다.
  • 존재는 물렁물렁하다. 그것은 구르고 허우적거린다. 나는 허우적거리고 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하므로 나는 허우적거린다. 나는 있다. 존재는 떨어진 전락이다.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손가락은 들창을 긁는다. 존재는 불완전한 것이다. 
  • 뛴다. 마음, 마음이 뛴다. 일종의 기쁨이다. 마음은 존재한다. 다리가 존재한다. 호흡이 존재한다. 모든 것이 존재한다. 
  • 화요일 - 아무 일도 없다. 존재했다.
  • "제가 슬픈 것은 어떤 쾌락에서 제가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생활의 한 부분 전체가 저에게는 낯설다는 점입니다."
  • "저도 그들이 젊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들을 사랑하는 까닭은 그 젊은 때문입니다. 특히 그것입니다.'"
  • 이것이, 이 눈부시게 명백한 사실이 그래 바로, 그 구토란 말인가? 나는 머리를 얼마나 쥐어짰던가. 나는 그것에 관해서 글도 많이 썼다. 나는 지금 알고 있다. 나는 존재한다. 세계는 존재한다. 그리하여 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뿐이다. 그래도 나에게는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라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무서운 일이다.
  • 만약 존재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가 나에게 물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외부로부터 와서 사물의 성질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한 채 부가되는 공허한 형체일 뿐이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거기에 있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 
  • 본질적인 것, 그것은 우연이다. 원래,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존재는 단순히 거기에 있다는 것 뿐이다.
  • 존재란 멀리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갑자기 우리에게 달려들고, 우리 위에 멎어서 거대한 짐승처럼 우리의 마음 위에 무겁게 내리누르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 흐르는 애벌레가 존재하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 구토는 잠시 멎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이 내게는 정상적인 상태인 것이다. 다만 오늘 내 몸은 그것을 견디기에 너무나 기진맥진해 있다. 따분하다. 그뿐이다. 가끔 눈물이 날 정도로 나는 하품을 한다. 그것은 깊고 깊은 권태며, 존재의 깊은 마음이며, 나를 만든 재료 자체다. 
  • 의식은 절대로 자기를 망각하지 않는다. 의식은 자기를 망각하려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식의 운명이다.

 

 

 

 

  • 인간은 순간순간 변하는 행동 때문에 본질을 규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
  • 구토란 인간이나 사물의 언어에 의해 성립되는 의미나 본질을 박탈당하고 괴물처럼 흐물흐물한 덩어리거나 무섭고 음탕한 벌거숭이 덩어리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 이전의 체계였고, 세계를 체험한 본질의 것이라는 것을, 또한 이것이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생명체인 이상 실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생들로 사르트르가 23세였고 보부아르가 21세였다. 모두 고등학교 철학교사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의 친구인 르네마(전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소개로 처음 알게 되었다. 젊은 두 남녀는 첫눈에 서로 반했다. 특히 보부아르 쪽에서 더욱 깊이 빠졌다. 사르트르의 외모는 볼품이 없었다. 키는 겨우 160cm에 불과했고 눈은 또 사팔뜨기였다. 그러나 그의 두뇌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천재였다. 이 이상한 천재에게 보부아르는 사랑의 포로가 된 것이다. 이렇게 만난 젊은 두 사람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계약결혼’이란 이름의 새로운 형태의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두 사람의 결합은 확실히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계약결혼 조건의 주요 내용은 이러했다.

  • 결혼식을 올리지 않는다.
  • 아이를 낳지 않는다.
  • 늘 함께 살 의무를 지지 않는다.
  • 부부 사이에 부르는 ‘튀(여보)’ 호칭을 쓰지 않고 거리를 두는 ‘부(당신 정도의 의미)’라는 호칭을 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의식적이든 우연이든 맞게 되는 타인과의 로맨스를 간섭하지 않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결혼을 이들은 시작한 것이다. 이런 조건 때문인지 사실 이 두 사람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제각각 숱한 여성과 남성들과 별도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서로 경쟁하듯이 혼외정사를 즐겼는데 요즘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행위를 그들은 평생을 해왔던 것이다.

 

 

사르트르가 처음 육체적으로 상대한 여성은 창녀였다. 19세 때였고 창녀는 22세였다. 시몬느라는 이 아가씨는 어릴 때 친척에게 몸을 빼앗기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18세 때부터 몸을 팔고 있던 창녀였다. 두 사람은 엉뚱하게도 한 장례식장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사르트르는 그 아가씨에게 빠져 사흘 밤낮을 그녀와 함께 침대에서 보냈다.

 

섹스를 몰랐던 사르트르에게 시몬느의 육체는 감미롭고 황홀했으며 그녀의 육체 깊은 곳으로 빨려 들기만 했다. 기겁을 한 사르트르의 가족들이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것은 사르트르의 가족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몬느가 스스로 사르트르의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더 멋지고 돈 많은 새로운 애인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1934 29세의 사르트르는 베를린에 있었다. 이때 사르트르는 이미 보부아르와 계약결혼을 한 뒤였고 보부아르를 파리에 남겨두고 베를린엔 혼자 와 있었다. 그가 베를린에 온 것은 일종의 유학이었다. 그런데 이 베를린에서 사르트르는 또 한 명의 여성과 로맨스를 갖게 된다. 상대는 마리라는 여성으로 유부녀였다. 이 유부녀와의 사랑에 사르트르는 한동안 깊이 빠졌다. 그해 크리스마스가 되어 파리로 되돌아 온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베를린에서 있었던 마리와의 연애 사건을 낱낱이 털어 놓았다. 이것은 용서를 비는 고백이 아니라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당당한 보고였다.

 

유학을 끝낸 사르트르가 베를린 생활을 청산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10대의 아름다운 소녀 한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러시아에서 독일로 이민 온 소녀였는데 이름이 올가였다. 당시 사르트르는 약물 복용으로 가끔 환각 증세를 보이곤 했는데 올가는 바로 이런 사르트르를 돌보는 간병인이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간병인과 환자와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남녀의 관계로 이어졌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사는 집안에서 올가는 함께 살면서 사르트르의 새로운 애인이 된 것이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서 보부아르는 그녀의 소설 <초대 받은 여자>에서 언급하고 있다. 즉 연하의 여성이 어떻게 연인을 빼앗아 가는가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녀는 소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르트르가 이렇게 바람을 피우는 동안 보부아르는 얌전히 사르트르의 곁만 지키고 있었을까. 그것은 아니었다. 보부아르도 이 사이에 몇 명의 남성들과 로맨스를 가졌다. 물론 사르트르도 알고 있었다.

 

사르트르 외에 그녀가 사귄 첫 번째 연인은 미국의 소설가 넬슨이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940년대 후반이었는데 보부아르는 그때 이미 39세의 나이였다. 보부아르는 넬슨과의 정사로 사르트르에 대한 질투의 괴로움을 이겨 낼 수 있었으며 또 성적으로 회춘을 할 수 있었다. 보부아르는 넬슨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사르트르의 입장이 묘하게 되었다. 질투라는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사르트르도 보부아르와 넬슨과의 관계가 깊어지자 긴장되고 침통해졌다. 이 긴장과 우울을 사르트르는 또 다른 미국 여성과 관계를 가지면서 잊으려고 했다. 이렇게 서로서로 ‘우발적 연애’를 하고 있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그러나 서로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은 채 용케도 잘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 차례의 위기가 있었다. 1950년대에 일시적으로 팽팽한 긴장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넬슨과의 관계를 청산한 보부아르가 이제는 17세나 연하인 한 신문기자와 사랑에 빠졌기 떄문이다. 이때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여행을 함께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랜츠먼이란 이 신문기자와 동거생활을 했던 것이다.

 

이때에도 사르트르는 이에 대항이라도 하려는 듯 겨우 17세에 지나지 않는 유태인계 알제리아란 소녀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이 소녀를 너무 깊이 좋아해 한때는 이 소녀와 정식 결혼식을 올릴까도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성을 되찾은 사르트르는 결국 이 소녀를 양녀로 삼으면서 보부아르와의 관계를 회복시켰다.

 

이즈음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던 레츠먼도 보부아르의 곁을 떠났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오랜만에 다시 옛날로 돌아왔으며 두 사람의 애정은 이런 파란을 거친 뒤 더욱 깊고 튼튼한 끈으로 묶여졌다. 그 뒤 두 사람의 괴이한 결혼생활은 51년 동안 계속되다 1980 4 15일 보부아르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사르트르가 천국으로의 여행을 떠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리고 사르트르가 떠난 6년 뒤인 1986 4 14일 보부아르도 79세의 나이로 영원한 연인인 사르트르의 뒤를 따라 이 세상을 떠났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두 사람의 계약결혼은 전통적인 규범이나 윤리관으로 볼 때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합이었다. 그러나 인습의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새로운 부부형을 제시해주었다.

보부아르도 마찬가지였다. 보부아르는 어릴 때부터 “나보다 지능이나 교양이 높고 권위를 갖추었으며 나를 위압할 수 있는 남성을 원했다”라고 말해왔으며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바로 이런 남성이었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두 사람은 나란히 철학교사 시험에 합격했다. 성적은 사르트르가 1등을, 보부아르가 2등을 했다. 처음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제의한 계약결혼 조건은 2년 동안이었다. 2년 동안 살아보고 살 만하면 그때 그때 연장해 나간다는 조건이었다. 보부아르는 이때의 일을 회고록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부부가 아니라 그냥 사실혼의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부부가 지켜야 하는 의무나 부담감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사르트르가 일부일처의 틀에 얽매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23세의 나이에 접촉하게 되는 많은 매력적인 여성들의 유혹을 모두 뿌리칠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는 우리 사이를 ‘필요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우발적인 사랑’도 서로가 알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또 우리의 결합은 억지로 유지되거나 하나의 습관으로 타락해서는 안 되며 모든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이러한 상태를 막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두 사람이 사는 동안 어떤 때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사르트르가 제3의 여인과 로맨스를 가지게 되면 사르트르는 이 사실을 편지로 보부아르에게 알려주곤 했다.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여인들과의 관계를 보부아르가 받게 될 마음의 상처나 고통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아주 노골적인 표현을 써 가면서 상세히 고백을 했다.

 

육체 관계를 가지면서 나누는 대화의 내용을 그대로 편지에 적는가 하면 여인들이 사르트르에게 사랑을 호소하는 연애편지 전문을 그대로 베껴 보내기도 했다. 잔인할 정도의 정직함조차 이들은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결합시킨 사랑은 보통 사람들의 애정관계와는 차원이 다른, 닿을 수 없는 높은 경지의 신뢰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특히 여성으로서의 보부아르의 탈선을 비판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상식적인 테두리를 인정하지 않는 보부아르는 이런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변명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만년에 가서 “개방적이고 대담해지는 섹스 관계가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태도의 해이를 정당화해 주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보부아르는 또 이런 말을 남겼다. “내 인생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성공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르트르와의 관계이다”라고 말했다.

 

인간들은 너무나 추상적으로만 자유를 말한다. 그들은 그저 외부의 강제만 없으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란 자기가 선택할 수 있고, 또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일이다. 자유란 곧 자신의 삶의 상황 속에서 확실성을 갖는 것이다.

 

 

 

 

 

 

 

 

 

 mubnoos

 

 위험한 소설이다. 언제 읽느냐에 따라 그 파괴력의 크기는 증폭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