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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댄스 (상) / 무라카미 하루키

by mubnoos 2025. 5. 2.

 

 
• 순서대로 교실 앞쪽에 나가서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에 관해 이것저것 지껄인다. 나는 그것이 정말 싫었다. 아니, 싫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는 그런 행위 속에서 아무 의미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을까? 내가 의식을 통해서 파악하고 있는 나는 진정한 의미의 나일까? 녹음된 목소리가 자기 목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내가 파악하는 자아의 상은 왜곡된 채 인식되어 모양 좋게 바뀌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 어쩌지 가공의 인간에 대한, 가공의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했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들도 역시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모두가 가공의 세계에서 가공의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튼, 무엇인가 지껄이기로 하자.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 지껄이는 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그것이 우선 첫 걸음이다. 바른지 그른지는 나중에 다시 판단하면 된다. 나 자신이 판단해도 되고 다른 누군가가 판단해도 된다. 어쨌든 간에, 지금은 이야기해야 할 때다. 그리하여 나도 해야 할 말을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껄이자. 그러지 않고선,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도 되도록 길게, 바른지 그른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면 된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반적으로 세상사란 것은 끝으로 가면 갈수록 그 질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주파수와 마찬가지다. 어느 한계점을 넘어 버리면, 인접하는 두 음형 중 어느 쪽이 높은가 하는 것 따위는 거의 분간해 낼 수 없으며, 이윽고 분간은커녕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다.

• 나는 내가 어떤 여자와 자면 좋은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와 잘 수 있으며 누구와 잘 수 없는가도 알고 있었다. 누구와 자면 안 되는지도. 나이가 들면 그런 것을 자연히 알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언제가 끝낼 때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다. 아무도 상처받게 하지 않았고, 내 쪽도 상처받지 않았다. 그 조이는 듯한 가슴의 떨림이 없을 뿐이었다.

•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단 한번도 웃지 않았다.

• 내가 고독하다는 것 - 이것이 진실이었다. 나는 누구와도 결부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나의 문제다. 나는 나를 되찾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와도 결부되어 있지 않다.

•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해야 할 일도 없거니와,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 섹스의 영역에서 공정이라는 것이 얼마만큼의 의미를 갖는 것인가, 하고 나는 자문해 봤다. 섹스에서 공정성을 찾는다면 차라리 이끼가 되는 게 낫지 않느냐, 그러는 편이 간단하지 않은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 “춤을 추는 거야“라고 양 사나이는 말했다. ”음악이 울리는 동안은 어쨌든 계속 춤을 추는 거야. 내가 하는 말 알아듣겠어? 춤을 추는 거야. 계속 춤을 추는 거야. 왜 춤추느냐 하는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애당초 없는 거야.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발이 멈춰 버려. 한번 발이 멈추면 이제 나도 도와줄 수가 없어. 그러면 당신의 연결고리는 모두가 사라져 버려.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거야.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이쪽 세계에서밖엔 살아갈 수 없게 돼. 자꾸자꾸 이쪽 세계로 끌려들고 마는 거야. 그러니까 발을 멈추면 안 돼. 아무리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런 데 신경쓰면 안 돼. 제대로 스텝을 밟아 계속 춤을 추란 말이야. 그리고 굳어 버린 것을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풀어 나가는 거야. 아직 늦지 않은 것도 있을 테니까. 쓸 수 있는 것은 전부 쓰는 거지. 최선을 다하는 거야.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어. 당신은 분명히 지쳐 있어. 지쳐서 겁을 먹고 있어. 누구에게나 그런 때가 있어. 무엇이든 모두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발이 멈춰 버리지. 하지만 춤을 추는 수밖에 없어. 그것도 남보다 멋지게 추는 거야. 모두가 감탄할 만큼 잘 추는 거지. 그렇게 하면 나도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지 몰라. 그러니 춤을 추는 거야. 음악이 계속 되는 한.

여기에 있는 것은 저쪽과는 또 다른 현실이야. 당신은 아직 여기서는 살아갈 수 없어. 여기는 너무나 어둡고 너무나 넓어. 내가 당신에게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란 어려워. 게다가 아까도 말했지만, 나로서는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거든. 여기는 물론 현실이지. 이렇게 현실에서 당신과 내가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그건 틀림이 없어. 하지만 말이지, 현실이 단 하나밖에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거야. 현실은 여러 개가 있지. 현실의 가능성은 몇 개나 있어. 나는 이 현실을 택했어. 왜냐하면 여기엔 전쟁이 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에겐 버려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당신은 달라. 당신에겐 생명의 따스함이 아직 뚜렷이 남아 있거든. 그래서 이 장소는 지금 당신에겐 너무나 추워. 먹을 것만 해도 여기에는 없어. 당신은 아직 여기로 와서는 안 되는 거야.

춤을 추는 거야.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 여러 가지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는 싶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거든. 춤을 추는 거야. 아무 생각 말고, 되도록 신나게 춤을 추는 거야. 당신은 그렇게 해야만 해.

• 매춘부라는 부류는 사생활과 영업용의 섹스를 어뗗게 분간하는 것일까? 그것은 나로선 짐작도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양 모피를 쓴 사람 이야기를 좀 해봐.“
”양 사나이 말이지?“
”어디서 양사나이를 만났지/“
”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어. 단지 문득 그렇게 생각했을 뿐인걸. 아저씨를 보고 있다가.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양 모피를 쓴 사람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색이 말이지. 아저씨를 그 호텔에서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그래서 그렇게 입 밖에 내어 말해 본거야. 거기에 대해 특별하게 뭔가 알고 있는 게 아냐.”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 모습이 보였다 그 말이 아니야? 그 양 사나이의 모습이.”
“표현이 잘 안 돼. 어떻게 말하면 될까? 그 양 사나이라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분명하게 떠오른다는 게 아니고, 알겠어? 뭔가 이렇게, 그런 것을 본 사람의 감저잉 공기처럼 이쪽으로 전달되는 거라고. 그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야. 눈에는 안 보이지만, 난 그것을 느끼고, 형태를 바꿔 놓을 수가 있어. 하지만 그건 정확한 형태는 아니고, 형태 비슷한 거야. 만약 누구한테 그것을 그대로 보여 줄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겐 분간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해. 그것은 즉 나밖엔 모르는 형태야. 어째, 제대로 설명을 못 하겠어. 우습지? 그렇지? 내가 하는 말 이해돼?“
”아주 막연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