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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by mubnoos 2025. 4. 28.

 

 

 

 

 

 

 

하루키의 리얼리티

 

 

하루키를 처음 만난 건, 군시절이다. 난 GOP에서 일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독하고,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며, 비현실적이다. 이것들은 군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였을까, 하루키의 이야기들은 군인들에게 독특한 색깔을 부여하고, 기묘한 공감대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GOP에서 근무하는 일병에게 교묘하고 정교하게 묘사된 섹스 장면은 맥심 잡지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마라톤을 뛰며 절실하게 상상하는 맥주 만큼이나, 먼지 쌓인 턴테이블에서 바늘이 닿는 순간 흘러나오는 색소폰 소리 만큼이나 도발적이다.

하루키는 스토리 보다는 스타일을 중시하는 작가다. 난 그 스타일을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이야기하느냐(What)보다 어떻게 이야기하느냐(How)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의 스토리는 사실 별 내용이 없다. 스토리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등장인물도 극소수다. 소설을 읽을 때 등장인물이 많으면 피곤하다. 하루키 소설은 이러한 복잡함을 최소화한 간결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별한 직업 없이 빈둥거리는 남자 주인공은 맥주를 마시거나 고양이와 놀고, 재즈를 들으며 쓸데없는 생각에 잠긴다. 운이 좋으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섹스를 하기도 하고, 공통적으로 삶의 허무함을 느낀다. 어쩌면 자대배치가 필요한 친구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단조롭고 반복되는 일상을 그만의 독특한 메타포로 표현하는 그의 스타일은 마치 몸보다는 옷이, 생얼보다는 화장발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고양이, 맥주, 생선 요리, 재즈 음악 등의 소재 역시 단조롭고 반복적이다. 그는 변함없이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한다. 사람들은 그런 변치 않는 스타일을 클래식이라고 한다. 하루키는 본인의 취향을, 그만의 스타일을 클래식으로 구축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 난 그 클래식을 버렸다. 그의 소설의 인물들은 돈 걱정, 미래 걱정, 취업 걱정, 현실적인 고민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야망이나 꿈 같은 것도 없이, 그저 현재 있는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할 뿐이었다. 대학교 3학년 때, 나는 하루키를 나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마약, 하루를 습하고 나른하고 공허하게 만드는 대마초, 쓸모없는 외로운 염소 울음소리 같은 존재라고 규정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모두가 섬세한 지느러미로 헤엄치는 동안 나만 둔탁한 지느러미로 따라가지 못하는 듯한 기분, 이 세상에서 나만 이상하고 기묘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이질감,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나 역시 불건전한 청년이 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나는 그의 작품을 멀리했다.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이다. 

다시 말하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은 결코 대극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립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이다."

 

 

 

 

 

 



20년은 된 거 같다. 오랜만이다, 하루키. 이 책은 하루키가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경험한 실제의 삶에 이야기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하루키의 실제 삶은 배신감이 들 정도로 목표지향적이고 의지적이다. 하루키의 실제 삶은 GOP의 군인처럼 고독하지도, 무기력하지도, 수동적이지도,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마라톤이나 트라이애슬론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안다. 그것은 웬만한 의지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카프카의 가출처럼 우연히 발생하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하루키의 만들어낸 '허구'와 하루키가 경험하는 '실제' 삶은, 그의 메타포를 빌리자면, 마치 서로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는 회전목마 같다. 하루키는 컴퓨터도 용도에 따라 나눠 쓴다고 한다. 소설을 쓸 때만 Mac을 쓰고, 다른 업무를 볼때는 Vaio를 사용한다고 한다. 만약 플라톤이 살아 있었다면, 연말에 '올해의 이데아상' 같은 것을 수여했을지도 모른다. 하루키의 허구의 세상과 실제 삶의 이분법적인 분리는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위안을 주기도 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하루키가 쓴 소설들을 읽으면서, 하루키는 왜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하곤 했다. 이 책은 그러한 과거의 궁금증들에 대한 일말의 힌트이기도 했다. 

 

"주어진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 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하루키 역시 '보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위로를 주었다. 그 역시 결혼했고, 요식업을 하기도 했고,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한계를 경험하고, 그 한계에서 전력을 기울이고,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고자 하는 마음가짐 -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보통의, 그리고 최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오랫동안 찾지 못했던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문득 발견했을 때처럼, 왠지 모르게 마음의 빈 곳이 채워지는 듯한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빵 가게의 리얼리티는 빵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밀가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키의 리얼리티는 하루키의 삶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소설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서문 | 선택 사항으로서의 고통


진정한 신사는 헤어진 여자와 이미 납부해버린 세금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다. - 라고 하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 말은 내가 방금 적당히 만들어낸 말이다. 


확실한 진정한 신사는 자신의 건강법에 대해 여러 사람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벌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느껴진다.

• 거의 나의 지금의 기분을 그대로 기록했다. 달리기에 대해 정직하게 쓴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직하게 쓰는 일이기도 했다.

• 여기에는 철학이라고까지는 말하기 어렵다 해도, 어떤 종류의 경험칙과 같은 것은 얼마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은 적어도 내가 나 자신의 신체를 실제로 움직임이로써 스스로 선택한 고통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누구나 공통적으로 잘 응용할 수 있는 범용성은 그다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무엇이 어떻든 간에, 그것이 나라는 인간일 것이다.
 


 

제1장 | 2005년 8월 5일 하와이 주 카우아이 섬

누가 믹 재거를 비웃을 수 있겠는가?

 



 헤밍웨이도 아마 비슷한 이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계속 하는 것 -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 러빙 스푼풀의 음악은 언제 들어도 멋지다. 필요 이상으로 자기를 과장해서 크게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 음악이다.

• 일주일에 60킬로, 한 달에 대충 260킬로라는 숫자가, 나에게는 착실하게 달린다고 하는 일단의 기준으로 정할 수 있다.
매일매일 정확하게 10킬로를 달리는 것은 아니고, 어제는 15킬로를 달리고, 오늘은 5킬로밖에 달리지 않은 날도 있다. 평균해어 하루에 10킬로라는 말이다. 조깅 페이스로 1시간 달리면 대체로 10킬로가 된다.

• 마라톤보다 트라이애슬론 쪽으로 마음이 기운 탓도 분명 있을 것 같다. 잘 알려진 것처럼 트라이애슬론은 마라톤뿐만 아니라 수영과 사이클 경기도 포함하고 있다. 나는 원래 육상 주자이기 때문에 달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다른 두 종목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훈련을 쌓아야만 했다.

• 그다지 열심히 달리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달린다는 행위에 어느 정도 싫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1982년 가을, 달리기를 시작한 이래 23년 가까이 계속 달렸다. 거의 매일같이 조깅을 하고, 매년 적어도 한 번은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고(계산해보니, 지금까지 스물 세 번 풀코스를 완주했다), 그 밖에도 세계 각지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장-단거리 레이스에 참가했다. 장거리를 달리는 것은, 내가 이제까지의 인생을 사는 가운데 후천적으로 익혔던 몇 가지 습관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익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20 수년간 끊임없이 달리는 것으로서 내 신체와 정신은 대체로 좋은 방향으로 강화되고 형성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 어떤 일이 됐든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이기든 지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더 관심이 쏠린다.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장거리 러너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 자신이 쓴 작품이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는가 못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변명으로 간단하게 통하는 일이 아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뭐라고 적당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유익한 운동인 동시에 유효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나는 매일매일 달리면서 또는 마라톤 경기를 거듭하면서 목표 달성의 기준치를 조금씩 높여가며 그것을 달성하는 데 따라 나 자신의 향상을 도모해 나갔다. 적어도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두고,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매일매일 노력해왔다. 나는 물론 대단한 마라톤 주자는 아니다. 주자로서는 극히 펑범한 그런 수준이다. 그러나 그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려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 40대도 중반을 넘어선 이후부터 자기 검증 시스템이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레이스의 기록이 향상되지 않게 되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신체 능력의 피크를 맞이한다. 그것을 피해갈 수는 없다. 내 경우는 40대 후반에 접어들어 주자로서의 정점이 왔다. 그때까지는 3시간 반을 목표로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고 있었다. 딱 1킬로에 5분, 1마일(1.6킬로)에 8분의 페이스다.

달리기만 하고 있으면 일그러진 몸매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다른 경기와 아울러서 더 균형 잡힌 탄탄한 몸집을 만들어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 달리는 일이 이전처럼 무조건 즐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다. 나와 달리는 일 사이에는 그처럼 서서히 권태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거기에는 지불한 만큼의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는 실망감이 있었고, 열려 있어야 할 문이 어느 사이에 닫혀 버린 듯한 폐쇄감이 있었다. 그것을 나는 ‘러너스 블루’라고 이름 붙였다.

• 달릴 때에는 대체로 록 음악을 듣는다. 떄로는 재즈를 든는 일도 있다. 그렇지만 달리는 리듬에 맞추는 걸 생각할 때, 역시 반주 음악으로서는 록이 가장 좋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레드 핫 칠리 펫퍼스나 고릴라즈, 제프 백, 클리던스 클리워워터 리바이벌, 비치 보이스, 같은 오래된 음악, 되도록 심플한 리듬의 음악이 좋다. 지금은 많은 러너가 아이팟을 들으며 달리고 있지만, 나는 손때가 묻은 MD쪽을 좋아한다. 아이팟에 비하면 다소 기계가 크고 정보 용량은 확연히 적지만 내게는 그만하면 충분히 잘 쓸 수 있다. 현재로선 아직 나는 음악과 컴퓨터를 혼동하고 싶지 않다. 우정이나 일과 섹스를 혼동하는 않는 것처럼.

•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혼자 있는 것을 별로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는 성격이다. 매일 1시간이나 2시간,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고 혼자 달리고 있어도, 4시간이나 5시간을 혼자 책상에 않아 묵묵히 글을 쓰고 있어도 별로 고통스럽다거나 지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경향은 젊었을 때부터 한결같이 내 안에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뭔가를 하기보다는 혼자서 말없이 책을 읽거나, 집중해서 음악을 듣는 쪽을 좋아했다. 혼자서 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었다.

 •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없이 항상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 달리고 있을 때 어떤 일을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대체로 오랜 시간을 달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깊이 생각에 잠기곤한다. 글쎄, 도대체 나는 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이제까지 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해왔는지,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공백 속에서도 그 순간순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진정한 공백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진공을 포용할 만큼 강하지 않고, 또 한결같지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 속에 스며들어 오는 그와 같은 생각은 어디까지나 공백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아닌, 공백성을 축으로 해서 성립된 생각인 것이다.

•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비슷하다. 여러 가지 형태의 여러 가지 크기의 구름. 그것들은 왔다가 사라져간다. 그렇지만 하늘은 어디까지나 하늘 그대로 있다. 구름은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그것은 스쳐 지나서 사라져갈 뿐이다. 그리고 하늘만이 남는다. 하늘이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체인 동시에 실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넓고 아득한 그릇이 존재하는 모습을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 “마흔 다섯 살이 되어 <새티스팩션>을 부르고 있을 정도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 - 믹 재거
젋은 날의 믹 재거는 45세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젊은 날의 나에게도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체험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 역시 처음으로 맛보는 감정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되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아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 나는 신체를 끊임없이 물리적으로 움직여 나감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극한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고보다는 오히려 직감적으로.

• 나는 나름대로 나이를 먹었고, 시간은 정해진 만큼의 몫을 받아간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인 것이다. 강이 먼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말하자면, 자연 광경의 일부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별로 유쾌한 작업을 아닐지도 모른다. 그 결과로서 찾게 되는 것은 그다지 기뻐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제2장 | 2005년 8월 14일 하와이 주 카우아이 섬
사람은 어떻게 해서 달리는 소설가가 되는가

 

 

소설을 쓰자고 생각을 하게 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있다. 1978년 4월 1일 오후 1시 반 전후였다. 그날, 진구 구장의 외야석에는 나는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야구를 관전하고 있었다. - 소설가가 되려는 것과 같은 야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나로서는 무엇이 어떻든 간에, 아무 생각 없이 소설이라는 것을 쓰고 싶었다.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이미지도 없이 '지금이라면 뭔가 나 나름대로의 의미 있는 그럴듯한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하고 느꼈던 것이다. - 그때가 봄이었는데, 가을에는 400자 원고지로 200매 정도의 작품 한 편을 다 썼다. 다 쓰고 나니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그게 바로 현재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는 작품이다. 나로서는 작품이 햇빛을 보게 될지 못 보게 될지 하는 것보다, 그걸 다 써낸 일 자체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 작품은 신인상을 타고, 그해 여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은 무난한 평가를 받았다. 나는 서른 살이 되어, 뭐가 뭔지 영문도 모른 채, 꼭 소설가가 되려는 확고한 의지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신진 소설가로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나도 놀랐지만, 주위 사람들은 더 놀랐을 것이다. 

 

가게를 경영하고, 나 자신도 매일 카운터에 자리를 잡고 칵테일이나 요리를 만들고, 한밤중에야 가게 문을 닫고, 집에 돌아와 부엌 테이블에 앉아서 졸음이 밀려올 때까지 원고를 쓰는 생활을 3년 가까이 계속했다. 보통 사람의 두 배쯤 되는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가령, 무슨 일이든 뭔가를 시작하면 그 일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정을 못 찾는 성격이다. 

"어쨌든 2년간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줘. 그래서 안 된다면 또 다른 데서 작은 가게를 열면 되지 않겠어? 아직 젊으니까 다시 시작할 수도 있잖아"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좋아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당시에는 빚도 꽤 남아 있었지만, 뭐 어떻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것이 1981년의 일이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자. 

 

  막 전업 소설가가 된 내가 맨 처음 직면한 심각한 문제는 건강의 유지였다. 본래 주의하지 않으면 살이 찌는 체질이다. 지금까지는 매일매일 격렬한 육체노동을 해왔기 때문에 저체중의 안정 상태로 머물러 있었지만, 아침부터 밤중까지 책상에 앉아서 원고를 쓰는 생활을 하게 되자 체력이 점점 떨어지고, 체중은 불어났다. 신경을 집중하는 와중에 나도 모르게 담배도 지나치게 피우게 되었다. 그 무렵에는 하루에 60개피의 담배를 피웠다. 

 

  달리는 것에는 몇 가지 큰 이점이 있었다. 우선 첫째로 동료나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특별한 도구나 장비도 필요 없다. 특별한 장소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달리기에 적합한 운동화가 있고, 그럭저럭 도로가 있으면 마음 내킬 때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릴 수 있다.  

 

매일 달리게 되면, 담배를 끊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었다. '더 달리고 싶다'는 자연스런 욕구는 금연을 계속하기 위한 중요한 동기가 되었고, 금단현상을 극복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담배를 끊는 것은 이전 생활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상징 같은 것이었다. 

 

전업 소설가가 되고 나서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가게를 그만두고 소설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생활 패턴을 일신하는 것이었다. 해가 뜰 때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되도록 빨리 자도록 하자, 라고 정했다. 그것은 누구나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생활이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생활 방식이었다. - 그렇게 해서 아침 5시 전에 일어나 밤 10시 전에 잔다고 하는, 간소하면서도 규칙적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루를 통틀어 가장 활동하기 좋은 시간대라는 것은,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 그것은 이른 아침의 몇 시간이다. 그 시간에 에너지를 집중해서 중요한 일을 끝내버린다.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뗗게 배분해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긴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스피드나 거리는 개의치 않고 되도록 쉬지 않고 매일 달리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게 달린다는 행위가 하루 세끼 식사나 수면이나 집안일이나 쓰는 일과 같이 생활 사이클 속에 흡수되어 갔다. 

 

마라톤 풀코스의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은 35킬로를 지나면서부터 다가온다. 

 

무엇이 공평한가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법이다. "정말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체중이 불어나서..." 라는 고민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이유로 오히려 하늘이 내린 행운이라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닐까? 

 

인생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한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령 불공평한 장소에 있어도 그곳에 있는 종류의 공정함을 희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에는 시간과 노력이 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헛수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공정함에 굳이 희구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어떤가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개인의 재량이다

 

마라톤은 만인을 위한 스포츠는 아니다. 소설가가 만인을 위한 직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학교란 그런 곳이다. 학교에서 우리가 배우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다'라는 진리이다.

 

'오늘은 달리고 싶지 않은데'라고 생각했을 때는 항상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너는 일단 소설가로서 생활하고 있고, 네가 하고 싶은 시간에 집에서 혼자서 일을 할 수 있으니, 만원 전철에 흔들리면서 아침저녁으로 통근할 필요도 없고 따분한 회의에 참석할 필요도 없다. 그건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에 비하면 근처를 1시간 달리는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지 않은가? 만원 전철과 회의의 광경을 떠올리면 나는 다시 한 번 스스로의 의지를 북돋아 러닝슈즈의 끈을 고쳐 메고 비교적 매끈하게 달려 나갈 수 있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세른세 살. 그것이 그 당시 나의 나이였다. 아직은 충분히 젊다. 그렇지만 이제 '청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난 나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조락은 그 나이 언저리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인생의 하나의 분기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나이에 나는 러너로서의 생활을 시작해서, 늦깍이이긴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본격적인 출발점에 섰던 것이다. 

 

 

 

 



제3장 | 2005년 9월 1일 하와이 주 카우아이 섬
한여름의 아테네에서 최초로 42킬로를 달리다

 

 

 

• 하나의 건강법은 낮잠을 자는 것이다. 나는 정말 낮잠을 잘잔다. 대체로 점심을 먹은 뒤에 졸음을 느끼고, 소파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그대로 잔다. 30분쯤 지나면 눈이 떠진다. 눈이 떠졌을 때는 몸의 나른함이 사라지고, 머리는 매우 맑아져 있다. 남유럽에서 말하는 시에스타다.  - 나는 일단 졸리게 되면 어떤 장소에서든 금세 잠이 들어버리는 체질이고, 이것은 건강 유지라는 관점에서 보면 매우 축하할 만한 특기이다. 단, 숙면을 취해서는 안 될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깊이 잠들어버리는 일도 있어서 떄로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젊었을 때 한 달 반이면 가능했던 일이 3개월이 걸리게 된다. 운동량과 달성된 일의 효율도 눈이 띄게 나빠진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체념하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만으로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생의 원칙이며, 그 효율의 좋고 나쁨이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은 아닌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걷지 않는 것을 스스로의 긍지로 여겨왔다. 마라톤은 달리는 경기이지 걷는 경기가 아니다. 그것은 내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실패의 원인은 명확했다. 달리기 양의 부족, 달리기 양의 부족, 달리기 양의 부족, 그것이 전부였다. 연습량의 절대 부족에다, 체중도 줄이지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더 이상 젊지 않다. 지불해야 할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것밖에는 손에 넣을 수 없는 나이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사고의 도정을, 지나온 자취를 기록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달린다는 행위를 축으로 한 개인사 같은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혀로 입술을 닦으면 안초비 소스 같은 맛이 난다. 

 

다리를 번갈아가며 앞으로 내딛는 것에만 의식을 집중한다. 그것 말고는 지금 당장 급박한 문제는 없다. 

 

37킬로 부근에서 모든 것이 싫증 나버린다. 아, 이젠 지겹다. 더 이상 달리고 싶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체내의 에너지가 완전히 바닥난 것 같았다.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가 된 기분이다. 물을 마시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달리기를 멈추고 물을 마시게 되면 그대로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목이 마르다. 그러나 물을 마시는 데 필요한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니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불평을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화가 난다. 

 

종착점이 보이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 갑작스러움에 대해 까닭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마지막이니까 사력을 다해 스피드를 내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해도 다리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는 방법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온몬의 근육이 녹슨 대패로 깎여 나간 것처럼 거칠게 보였다. 골! 드디어 결승점에 다다랐다. 성취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 머릿속에는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좋다'라는 안도감뿐이다. 

 

맥주는 물론 맛있다. 그러나 현실의 맥주는 달리면서 절실하게 상상했던 맥주만큼 맛있지는 않다. 제정신을 잃은 인간이 품는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더 이상 한 발짝도 달릴 필요가 없다. 뭐라고 해도 그것이 가장 기쁘다. 아아,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 

 

• 완주 하고 나서 조금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일이나 한심한 생각을 했던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음에는 좀 더 잘 달려야지하고 결의를 굳게 다진다.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그렇지, 어떤 종류의 프로세스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변경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와 어느 모로나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요한 반복에 의해 자신을 변형시키고, 그 프로세스를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서 수용할 수 밖에 없다. 아, 힘들다. 

 

 

 

 

 




제4장 | 2005년 9월 19일 도쿄
나는 소설 쓰는 방법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설사 절대적인 연습량은 줄이더라도, 휴식은 이틀 이상 계속 하지 않는 것이 트레이닝 기간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규칙이다. 근육은 잘 길들여진 소나 말 같은 사역 동물과 비슷하다. 주의 깊게 단계적으로 부담을 늘려 나가면, 근육은 그 훈련에 견딜 수 있도로 자연스럽게 적응해 나간다. - 이만큼의 작업을 잘 소화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기억이, 반복에 의해서 근육에 입력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달리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 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에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소설가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입니까?" 소설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자질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재능이다. 문학적 재능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소설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필요한 자질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전제 조건이다. 연료가 전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자동차도 달릴 수 없다. 재능 다음으로 소설가에게 중요한 자질은 집중력을 꼽는다. 자신이 지닌 한정된 양의 재능을 필요한 한 곳에 집약해서 쏟아 붓는 능력, 그것이 없으면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이 힘을 유효하게 쓰면 재능의 부족이나 쏠림 현상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집중력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지속력이다. 

 

"비록 아무것도 쓸 것이 없다고 해도 나는 하루에 몇 시간인가는 반드시 책상 앞에 앉아서 혼자 의식을 집중하곤 한다." - 레이먼드 챈들러

 

책상 앞에 앉아 신경을 레이저 광선처럼 한 곳에 집중하고, 무의 지평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적합한 단어를 일일이 선택해서 전체의 흐름일 있어야 할 위치에 계속 유지시키는 그러한 작업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장기간 동안 필요로 한다. 

 

젊고 재능이 있다는 것은 등에 날개가 돋친 것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든 견뎌 나가는 사이에 자신 속에 감춰져 있던 진짜 재능과 만나기도 한다. 삽을 써서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발밑의 구멍을 파 나가다가 아주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비밀의 수맥과 우연히 마주치는 그런 경우다. 이런 경우 정말 행운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러나 그 같은 행운이 가능하게 된 것도 그 근원을 따지면 깊은 구멍을 파 나갈 수 있을 만큼 확실한 근력을 훈련에 의해서 몸에 익혀왔기 때문인 것이다. 

 

주어진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천성적으로 종합적 경향 같은 것이 있어서, 본인이 그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정도이다. 경향은 어느 정도까지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근본적으로 변경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천성이라고 부른다. 

 

 

헉헉, 하면서 짧은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것은 초보자이고, 조용히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것은 베테랑이다. 

 

없다고 해도 불평하지 않는다. 있는 것만으로 참는다. 뭔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나이를 먹어가며 얻게 되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다. 

 


 

 


제5장 | 2005년 10월 3일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만약 그 무렵 내가 긴 포니테일을 갖고 있었다 해도


 
많은 물을 일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 행위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인간에게 있어서라는 것이 약간은 과장일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얼마 동안 물을 보지 않고 있으면 내가 무언가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사정으로 오랜 시간 음악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을 때 느끼는 기분과 다소 비슷할지도 모른다. 내가 바닷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태아나 자랐다는 사실도 얼마쯤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수면은 나날이 미묘하게 변화하고, 색이나 파도의 형태나 유속이 변해간다. 그리고 계절은 강을 둘러싼 식물과 동물들의 모습을 확실하게 변모시켜 간다. 여러 크기의, 여러 모양의 구름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다가는 사라져가고, 강은 햇살을 받아서 그 하얀 구름이 오가는 것을 어느 때는 선명하게, 어느 때는 애매하게 수면에 비춘다. 계절에 따라서, 마치 스위치를 전환하는 것처럼 바람의 방향이 변화한다. 그 살결에 닿는 감촉과 향기와 방향으로 우리는 계절의 추이를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런 실감을 동반한 흐름 속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가 자연의 거대한 모자이크 속의 미세한 하나의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새 미즈노 러닝 슈즈도 샀다. 여러 가지 메이커의 신발을 시험 삼아 신어본 결과, 지금 연습 때 신고 있는 것과 같은 미즈노를 선택했다. 전체적으로 가볍고 발꿈치 쿠션도 꽤 딱딱하다. 이 메이커의 슈즈에는 묘한 멋 내기가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신뢰감을 가질 수 있다. - 신발 밑창은 확실하고, 정직하고, 굳건하게 도로의 노면을 붙잡는다. 

 

나는, 내 자랑을 하는 건 아니지만,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산만큼 있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산더미처럼 있다.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나에게는 나에게 적합한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이 불건전한 작업이라는 주장에 나는 기본적으로 찬성하고 싶다. 우리가 소설을 쓸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문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며 나가려고 할 때는 인간 존재의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좋든 싫든 추출되어 표면으로 나온다. 작가는 다소간 그런 독소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위험을 인지해서 솜씨 좋게 처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독소가 개재되지 않고 참된 의미의 창조 행위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건전한 작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기초 체력의 강화는, 좀 더 큰 규모의 창조를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일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은 해볼 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이다, 라고 빋고 있다. 그리고 무척 평범한 견해이긴 하지만, 흔히 말하듯,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는 열심히 하는 만큼의,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리만큼의, 가치가 있다.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이다. 다시 말하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은 결코 대극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립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이다. 때때로 건전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건전한 것만을 생각하고, 불건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불건전한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편향은 인생을 진정으로 내실 있는 것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외국어를 사용해서 이야기를 꾸며 나가려고 하면 나에게 주어진 언어의 선택지와 가능성이 필연적으로 제한되기 떄문에 그만큼 도리어 편한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다. 

 

 


 

 


제6장 | 1996년 6월 23일 홋카이도 사로마 호수에서
이제 아무도 테이블을 두드리지 않고 아무도 컵을 던지지 않았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렇게 나 자신을 타일렀다. 거의 그것만 생각하면서 참았다. 만약 내가 피도 살도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거나 하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허물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다. 

 

내가 이처럼 피로에 지쳐버린 상태에 빠져 있고, 그 극도의 피로를 한 몸에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채, 더욱이 이렇게 착실하게 계속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나로서는 그 이상 세상에 바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 단계에는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머릿속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그 이상함을 느낄 수 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달린다는 행위가 거의 형이상학적인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행위가 먼저 거기에 있고, 그 행위에 딸린 것 같은 존재로서 내가 있다.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끝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우선 한 단락을 짓는다는 것뿐으로, 실제로는 대단한 의미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이 있기에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라는 사물의 의미를 편의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이기 위해서, 혹은 또 그 유한성의 에두른 비유로서, 어딘가의 지점에 다른 일은 젖혀놓고 우선 종착점이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매우 고요하고 고즈넉한 심정이었다. 의식 같은 것은 그처럼 별로 대단한 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나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일을 하는 데 있어 의식이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존재로 다가온다. 의식이 없는 곳에 주체적인 이야기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의식 같은 건 특별히 대단한 것은 아닌 것이다, 하고. 

 

울트라 마라톤의 체험이 나로 하여금 터득하게 한 여러 가지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었다. 내가 갖게 된 것은 어떤 종류의 정신적 허탈감이었다. 문득 떠오른 것은 러너스 블루라고나 할 만한 것이, 엷은 필름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울트라 마라톤을 달리고 난 뒤에 나는 달린다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 이전처럼 자연스런 열의를 가질 수 없게 되어버린 듯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육체적인 피로를 여간해서 잘 풀기 어려웠다는 것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달리고 싶다는 의욕이 내 안에서 이전처럼 명확하게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내 안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던 것이다. 매일의 조깅 횟수도, 거리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다수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렇듯이 나는 쓰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간다. 다시 고쳐 씀으로써 사색을 깊게 해나간다. 

 

어쩌면 결국에는 이렇게 단정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마 인생이 아닐까, 라고, 우리는 아마 그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송두리째, 이유도 모른 채 그 어떤 경위에도 아랑곳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고. 세금이나 조수의 간만, 존 레논의 죽음과 월드컵의 오심과 마찬가지로. 

 

나는 기록에 도전하는 무심한 젊은이도 아니고, 한낱 무기적인 기계도 아니다. 한계를 알면서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오래 자신의 능력과 활력을 유지해가려 하는, 한 사람의 직업적인 소설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제7장 | 2005년 10월 30일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뉴욕의 가을

 


문제는 그처럼 제대로 달리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무릎이 통증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인생에 있어서 문제의 태반이 그렇듯이 이 통증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돌연히 찾아왔다. - 매일매일의 힘든 연습을 벗으로 삼는 장거리 주자에게 있어서 무릎은 항상 부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부위다. 달리고 있으면 착지할 때마다 체중의 세 배가 되는 충격이 발에 가해진다고 한다. 그것이 하루에 1만 번 가깝게 되풀이 되는 것이다. 딱딱한 콘크리트 노면과 가공할 만한 하중의 증가 사이에서 무릎은 침묵을 지키며 참고 있다. 

 

 

 


 

 



제8장 | 2006년 8월 26일 가나가와 현에 있는 어느 곳
죽는 날까지 열여덟 살

 

 

수영, 사이클, 마라톤이라는 트라이애슬론 세 가지 부문 속에서 아무래도 사이클 연습은 뒤로 제쳐놓게 된다. 

내가 타고 있는 사이클은 파나소닉의 티타늄제 스포츠 바이크, 날개처럼 가볍다. 지금까지 7년째 같은 사이클을 타고 있다. 이 사이클로 지금까지 네 번의 트라이애슬론 레이스를 체험했다. 프레임에는 '18 'till I die'라고 쓰여 있다. 브라이언 아담스의 히트곡 <죽는 날까지 열여덟 살>의 제목을 차용했다. 물론 조크다. 죽는 날까지 열여덟 살로 있으려면 열여덟 살에 죽지 않으면 안된다. 

 

경기용 사이클을 탈 때 무엇보다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 바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 몸을 되도록 앞으로 기울이고, 얼굴은 전면을 향해 들고 있어야 하는 일이다. 

 

무서운 일을 한 번이라도 당한 사람은 거기에서 몸소 사무치게 뭔가를 배우게 된다. 무슨 일의 기본을 착실하게 몸에 익히려면 많은 경우 육체적인 아픔이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 달릴 것이다. 설령 기록이 더 떨어진다 해도 나는 아무튼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다는 목표를 향해서 예전과 같이 노력을 계속해나갈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의 나의 성격인 것이다. 전갈이 쏘는 것처럼, 매미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연어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원앙이 서로를 갈구하는 것처럼. 그것이 나에게 있어, 그리고 이 책에 있어서, 하나의 결론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의 편린 같은 것이 보일까?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 태평양 상공에 덩그러니 떠 있는 무심한 여름 구름이 보일 뿐이다. 그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구름은 언제나 말이 없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하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시선을 향해야만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안쪽인 것이다. 나는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린다. 깊은 우물의 바닥을 보는 것처럼.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이 보일까? 아니,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같은 나의 성격일 뿐이다. 개인적이고, 완고하고, 협조성이 결여된, 때로 자기 멋대로인, 그래도 자신을 항상 의심하며,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거기에 우스꽝스러운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나의 본성이다. 

 

아마도 거듭될 안티 클라이맥스를 향해서, 과묵한 바로크적인 원숙 - 보다 겸허하게 표현한다면 '진화의 궁극적인 끝' - 을 향해서

 

 

 

 

 

 


제9장 | 2006년 10월 1일 니가타 현 무라카미 시
적어도 최후까지 걷지는 않았다

 


• 물론 열어섯 살이라고 하면, 아마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무척 골치 아픈 나이다. 세세한 일이 하나하나 맘에 걸리고,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우쭐해지거나 콤플렉스를 느끼거나 한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주워 담을 것을 주워 담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결점이나 결함은 일일이 세자면 끝이 없다. 그래서 좋은 점도 조금은 있게 마련이고, 가진 것만으로 어떻게 참고 갈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거울 앞에서 발가벗고 내 육체적인 단점을 열거했을 때의 약간 한심한 감각이 스쳤던 기억은 지금도 내 안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상처럼 남아 있다. 단점이 압도적으로 많고, 장점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나라는 인간의 불쌍한 대차대조표.

 

그로부터 40년쯤의 세월이 지나 검은 수영복에 몸을 감싸고 고글을 머리 위에 쓰고, 바닷가에 서서 트라이애슬론 레이스의 스타트를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그 당시의 기억이 문득 되살아난다. 다시 한 번 나라고 하는 그릇이 얼마나 가련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나 자신이라는 그릇이 마치 애처롭고 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 와서 무엇을 한다 해도 쓸데없는 일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든다. 나는 이제부터 1.5킬로를 헤엄치고, 40킬로를 자전거로 주파하고, 10킬로를 달리려 하고 있다. 이런 일을 해서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바닥에 작은 구멍이 난 낡은 냄비에 부지런히 물을 붓는 것과 같은 일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아무튼 쓸데 없는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고 나 자신에게 타이른다. 여기까지 와버렸는데 이젠 그저 레이스를 마칠 수밖에 없다. 3시간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헤엄치고, 그저 사이클을 타고, 그저 달리는 것뿐이다. 

 

트라이애슬론 레이스에 출전하는 것은 장,단거리를 합해서 이번이 여섯 번째가 된다. 그러나 4년간 트라이애슬론에서 멀어져 있었다. 왜 그런 공백이 있는가하면, 2000년 레이스 도중 갑자기 수영을 못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충격에서 벗어나 다시금 정상상태를 되찾는 데 시간을 소비해버린 것이다. 왜 수영을 할 수 없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자신감도 잃어버렸다. 어떤 레이스가 되었든 도중에 기권한다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겪은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영장에서도 바다에서도 비교적 편하게 장거리를 자유형으로 헤엄칠 수 있다. 보통 1,500미터를 33분 정도로 헤엄칠 수 있다. 바다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바다에서 수영하는 데도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막상 실제 레이스에 출전했을 때도 왠지 잘 헤엄칠 수가 없다. 바다에 들어가서 막상 수영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호흡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평상시처럼 얼굴을 들고 숨을 쉬려고 해도 왠지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호흡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공포가 전신을 지배하고 근육이 굳어버렸다. 가슴이 까닭없이 울렁거리고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얼굴을 물에 댈 수가 없었다. 이른바 패닉 상태이다. 

 

수영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 사이에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다. 내가 본 레이스에서 자유형의 호흡이 잘 안 되었던 것은 실은 '과호흡' 탓이었다. 나는 스타트 전에 지나치게 호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레이스 전의 진장 탓일 것이다. 산소를 급격히 많이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러니가 시작할 때는 허억 허억 하고 숨이 차올라서 호흡 타이밍이 엉망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구체적인 원인이 판명되고 나니 마음이 무척 편해졌다. 

 

드디어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사이렌 소리에 모두 일제히 헤엄쳐 나가고 누군가 내 옆구리를 찬다. 깜짝 놀란다. 또 틀렸나, 하는 공포가 순간 뇌리를 스쳐간다. 약간 물을 먹는다. 재빨리 평영으로 바꿀까?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반드시 잘 해낼 수 있다. 숨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자유형 동작을 시작한다. 숨을 들이마시는 것보다 물속에서 숨을 내쉬는 것에 의식을 집중한다. 그리운 버블링 소리가 위에 와 닿는다. 그래, 그렇지, 그러면 되는거야. 내 몸이 파도를 타고 원활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보통 사람들처럼, 가령 몇 살이 되어도 살아 있는 한, 나라고 하는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은 있는 것이다. 발가벗고 거울 앞에 아무리 오랜 시간 바라보며 서 있는다 해도 인간의 속까지는 비춰주지 않는다. 

 

사이렌이 울린다. 모두 일제히 자유형으로 수영하기 시작한다.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나도 머리부터 물속으로 들어가서, 다리를 박차며 두 팔로 물을 젓는다. 다른 일은 머릿속에서 다 몰아내고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보다 내뱉는 것에 의식을 집중한다. 심장이 마구 뛴다. 레이스가 잘 잡히지 않는다. 몸이 얼마간 굳어 있다. 으레 그렇듯 누군가가 내 어깻죽지를 걷어찬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내 몸위로 덮친다. 거북이의 등껍질에 다른 거북이가 올라타 있는 것처럼. 덕분에 물을 조금 먹는다. 그러나 대단한 양은 아니다. 당황할 필요는 없다고 자신에게 타이른다. 패틱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호흡을 규칙적으로 반복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조금씩 몸의 긴장이 풀려 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든 잘 될 것 같다. 이런 상태로 계속 수영해 나갈 수 있으며 좋은 것이다. 일단 리듬을 붙이게 되면 그 후에는 그것을 유지해가기만 하면 될 뿐이다. 

 

예상도 하지 못했던 문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자유형을 하는 것과 동시에 얼굴을 들고 앞을 향해 방향을 확인하려고 하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고글이 흐려져 있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의 성질은 성적이나 숫자나 순위라고 하는 고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 속에 유동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에 다다를 수도 있다. 

 

효능이 있든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감으로써, 그리고 경험칙으로써.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놓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후기 | 세상의 길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