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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과 멀미
• 엄중한 순간에 던져지는 사소한 질문에 대해, 그 기묘한 효과에 대해,
• 인간은 질문을 받으면 답을 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예정된 죽음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인간은 약간의 고심을 할 수 있고 눈앞에 닥쳐온 진짜 문제를 잠시 망각할 수 있다.
• 신용카드로 결제하기로 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은 뇌에서 고통을 느끼는 영역을 활성화시킨다고 한다. 아무리 자의로 주는 돈이라 해도 빼앗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리라. 신용카드는 내 지갑에서 나와 잠깐 상대방에게 건너가지만 곧 되돌아온다. 현금은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 계획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가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추구의 플롯'에서는 주인공이 결말에 이르러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지만, 여행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뜻밖의 사실'이나 예상치 못한 실패, 엉뚱한 결과를 의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정해진 일정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며, 안전하게 귀환하기를 원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의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걸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각성은 대체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과정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 모든 인간에게는 살아가면서 가끔씩은 맛보지 않으면 안되는 반복적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과 만나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갖는다거나, 철저히 혼자가 된다거나, 죽음을 각오한 모험을 떠나야 한다거나, 진탕 술을 마셔야 한다거나 하는 것들.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이런 경험을 '복용'해야. 그래야 다시 그럭적럭 살아갈 수가 있다. 오래 내면화된 것들이라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면 때로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런저런 합리화를 해가며 결국은 그것을 하고야 만다.
•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 프로그램이란, 자신도 잘 모르면서 하게 되는 사고나 행동의 습관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보통은 한곳에 정착하며 아는 사람들과 오래 살아가야만 안정감이 생긴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
• 평생토록 나는 이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1) 낯선 곳에 도착한다. 두렵다. 2) 그런데 받아들여진다. 3) 다행이다. 크게 안도한다. 4) 그러나 곧 또다른 어딘가로 떠난다.
• 나는 호텔이 좋다.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는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집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가?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 호텔 청소의 기본 원칙은 이미 다녀간 투숙객의 흔적을 완벽히 제거하는 것이다.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 호텔은 집요하게 기억을 지운다.
오직 현재
• 오래전에 읽은 소설을 다시 펼쳐보면 놀란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거의 없다. 소설 속의 어떤 사건은 명확하게 기억이 나는 반면 어떤 사건은 금시초문처럼 느껴진다. 모든 기억을 과거를 편집한다.
• 발상은 무게가 없다. 지혜도 그렇다. 기술도 마찬가지. 그래서 이런 무형의 자신을 가진 사람은 어딘가에 붙들려 있을 필요가 없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먹고 살기에도 유리했다.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노바디의 여행
여행으로 돌아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