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를 보던 초등학교 2학년 딸이 질문했다.
"아빠! 부산 어떻게 가?"
"모르겠는데, 네비 보고 가겠지."

운전해서 부산 가본 적 있다. 하지만 부산 가는 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긴 코스 위의 복잡한 방향의 선택들을 예측하거나 기억할 수 있을까? 사실 부산 가는 길은 알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냥' 네비 보고 '지금' 이 길에서 우회전, 좌회전, 혹은 직진해야 할지만 알면 다음 방향은 그때 가서 확인하고 가면 된다. 그렇게 가다 보면, 목적지인 부산에 갈 수 있다. 다시 말해, 목적지를 가는 과정 전체를 알 필요는 없다.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만 알고 간다면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내가 원하던 목적지에 있을까? 그때 지금의 나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지금의 내가 예전에 원하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면 더 좋았을까? 내가 했었던 선택들이 이성적이고 계획적이였을까? 목적이 이끄는 삶이었을까? 대부분의 나의 선택들은 '그냥' 한 것들 아닐까?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고 난 후, 이성이나 논리에 따라 애써 해석하며 반복해온 것은 아닐까? 나만 그런가?
세상에 확실하게 정해진 목적 같은 것이 존재할까? 물리학자들은 결국 '우주에는 정해진 의미 같은 것은 없다'고 증명한 것 아닐까. 예컨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입자이며 동시에 파동이라는 말장난 같은 양자역학, 세상은 원래부터 흐릿하게 존재하며 완벽한 측정을 할 수 없다는 김새는 불확정성 원리_ 물리학자들의 김새는 말장난들을 기반으로 한 실제 세상은 나에게는 마치 액체괴물 같다. 확실한 형태도 의미도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정확한 목적 같은 것을 확실하게 소유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목적에 의해 만들어졌을까? 그렇게 믿을 순 있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 가고 있는 세상은 정해진 목적이 아니라, 우연한 실수들로 만들어졌다. 순간순간의 실수들이 변화를 만들어내고 지금의 모습으로 세상은 진화해왔다. 거대한 우주가 정해진 목적이 아닌 우연을 통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데, 그 세상 안에 소속된 작은 내가 나의 목적대로 삶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억울하다고 할 수 있을까? 목적 없이 살고자 함이 아니다. 목적대로 되지 않더라도, 살아가야 함이다. 그런 삶의 무작위성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겸손의 본질 아닐까? 어쩌면 진부한 정답보다는, 오히려 흥미로운 오답이 우리를 ‘목적’으로 이끌수 있지 않을까?
글을 시작할 때는 '뭐라도 쓰겠지'라는 마음으로 무슨 말을 할지 모른채 시작했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니 하나의 글이 되었다. 먼저 무엇을 쓸지 생각하고 글을 쓸 때도 있지만, 무엇을 쓸지 모르고 '그냥' 글을 쓰기도 한다. 글이 어디론가로 데려가 주리라는 믿음일까? 생각이 글이 되는 순간 무엇을 쓰고 싶은지 확인할 수 있어서 일까? 쓰기는 목적을 내려 놓고 손을 움직여서 목적을 발견해가는 행위 같다. 이런 면에서 쓰기는 잡히는 것과 잡히지 않는 것을 엮어 내는 신비한 도구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것, 역시 무작위적인 세상과 모호한 나를 엮어 내는 신비한 도구일 수 있지 않을까? '뭐라도 되겠지'라는 말은 나중에 어디에 도착하는 것보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삶에 목적지라는 게 있긴 할까? 삶은 마라톤일까? 인생은 정해진 코스를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 아니라,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는 순간순간의 댄스 아닐까? 춤출 수 있는 곳이 모든 곳이 목적지가 될 수 있는 그런 느낌. 그냥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따라 동작들을 이어가는 것 아닐까? 이렇게도 춰보고, 저렇게도 춰보고, 그러다가 하기 싫거나 힘들면, 가만히 쉬어도 보고...그러다보면 뭐라도 되겠지... 뭐라도 되겠지... 뭐든지 될 수 있겠지... 불확실성은 오히려 삶의 무한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