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세가 됐다. 46억년의 지구의 역사보다 더 황당한 신비다. 내가 아저씨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중년이라는 사실은 최근이 되어서야 발견했다. 중년은 청년과 노년의 중간인가? 생각해보면, 중년도 얼마 안 남았다. 무어의 법칙 같은 이 시간의 속도라면, 늦지 않게 죽음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중년이라면 적어도 절반 이상은 산 셈이다. 그 절반 동안 난 소중한 가족을 꾸렸고, 안정적인 직장에 소속되어 있으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중간 치고는 남들하는 건 잘 흉내내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남은 후반전은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것들을 하면서 살고 싶다. 넘버 원 말고 온리 원의 삶이랄까? 넘버 원은 타인이 만든 규칙에서 최고가 되어야 하지만, 온리 원은 내가 만든 규칙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1. 가족: 난 졸혼을 하고 싶다.
2. 직장: 자유롭게 일하고 싶다.
3. 사회: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
1. 가족: 졸혼 하고 싶다.
이혼 말고 졸혼, 제대를 생각하며 열심히 군생활하는 것처럼, 결혼 생활을 열심히 하기 위한 일종의 목표랄까? 나이 많은 아저씨보다 세상에서 인기 없는 존재가 또 있을까? 그 비인기 존재에 대한 저항의 표현? 지금의 아빠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일 질문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아빠를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전 아빠의 행동을 반대로 하면, 지금의 아빠들에게 답에 가까운 경우가 더 많다. 소변 볼 때도 앉아야 할지 서서 할지, 설겆이는 식사를 하자마자 해야 하는지, 주말에 소파에 누워서 자도 되는건지? 가족에서의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개념은 분명히 진화했다. 자연에서 수컷의 주된 역할은 군비경쟁일까? 씨 주고 돈 주고 고장나면 죽는 것이 남자의 삶일까? 내가 고장났을때 가족이 날 지켜줄 수 있을까? 가족이 날 지켜주기 바라기는 할까? 돈 못 벌면 아빠도, 남자도,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닐까? 마치 카프카의 벌레 같이 역할이 없어지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닐까?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과연 이기적인 것일까? 그렇다면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타적인 것일까? 그걸 인정하면 편할까?
각자도생의 시대다. 이렇게 쓰고 나니, 좀 삭막한 느낌이다. 이미 개인주의자가 된 거 같다. 개인은 자기만의 삶의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아빠나 남편이 아닌 나로써 호명사회에 존재하고 싶다. 꽤나 개인적이다. 난 홀로 남으신 엄마를 볼 때마다 말한다. "엄마 나 잘 살고 있어. 내 걱정하지 말고 엄마는 엄마 삶 살아, 행복하게." 점점 늙어가시는 엄마는 아직도 중년의 아들 걱정을 하신다. 속상하다. 그런 관점에서 내 딸은 나의 선택을 인정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2. 직장: 자유롭게 일하고 싶다.
약 150년 전쯤에는 '노예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후의 사람들은 '직장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영화나 역사에서 배우게 되지 않을까? "내가 책에서 봤는데, 옛날에는 말이야. 힘들게 공부해서 회사라는 곳에 가서 정해진 시간 동안 시키는 일을 하고 그만큼 돈을 받았데. 대부분 일하기 싫어 했는데, 재미있는 건 사람들마다 받은 돈의 양이 달랐데. 더 재미있는 건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일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했데. 노예제도랑 직장제도랑 비슷하지 않아?"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던가? 인생은 버팀이라고? 적어도 일이 나의 버팀의 영역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난 일의 목적이 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기는 한가? 일은 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이다. 일의 본질은 사회에서 내 자리를 얻고 내 역할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은 '나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나답게 일하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내가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일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게 내가 원하는 바다.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했던가. 일을 통해 제품과 서비스를, 그리고 타인을 알고 싶어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따르는 일을 하고 싶다. 나는 나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하고, 내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좋다는 실감을 얻기 위해서 일을 하고 싶다.
3. 사회: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내가 나의 끝을 선택하고 싶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서 움직이실 수도, 말씀 하실 수도 없는 상태로 몇 년을 계셨다. 할머니는 과연 그러길 원하셨을까? 할머니는 평소에 이런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 '늙으면 죽어야지', '오래 살아서 무엇하랴'. 어쩌면 죽음 보다 이 상황이 더 두렵고 불편하시진 않을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가족들이 나의 삶을 지연하는 것을 보는 그것은 불편하고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삶도 죽음도 선택할 수 없는 무력감,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는 삶은 어쩌면 죽음보다 더 잔인한 구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안락사는 불법이다. 자기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어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자살을 의미한다. 우리는 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일까? 개인에게 주어진 삶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의 선택 또한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항상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 죽음 또한 선택할 수 없다. 우리는 삶과 죽음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 존엄하게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 존엄사가 여의치 않다면, 한니발 장군처럼 치사량의 마약을 벨트에 숨기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택하고 싶을 정도다.
니체는 3가지의 삶이 있다고 했다. 첫째, 희생과 복종의 낙타의 삶, 둘째, 반항하며 싸우는 사자의 삶, 그리고 진정한 자유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어린아이의 삶, 니체는 마지막 어린아이의 삶을 초인이라고 했던가? 어린아이만큼 개인적인 존재가 또 있을까? 내가 선언하고 싶은 게 있다면 중년이 지나도 그 어린아이의 삶을 살고 싶다. 세상만물이 순수한 호기심의 대상이고 가벼운 마음과 무한한 가능성으로 진정한 자유를 만들어가는, 그 어린아이의 삶을 선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