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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프리카 / 자서전

by mubnoos 2025. 1. 22.

 

 

 

 

 

 

시에라리온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렵고 복잡하다. 시에라리온은 기본적으로 정수, 정화조 및 전기시스템이 없다. 자연상태의 물을 마시고, 아무데서나 볼 일을 본다. 휴지도 없기 때문에 뒷처리로 풀잎따위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길에서 콜라를 마시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슈퍼스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곳에서 발전기를 통해 전기를 얻고, 컴퓨터와 프린터를 작동시켜 E항공티켓을 손에 쥐는 것은 막막한 일이다. 항공티켓을 출력하는데만해도 1주일 이상 소요됐다. 프린터가 있는 곳을 아는 것도 어려웠고, 오토바이를 4번이나 갈아타고 도착해서 발전기를 키고 컴퓨터를 키고 웃돈을 주고 항공티켓을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짐을 버리고 버렸건만, 공항에서 좀 더 작은 가방을 터무니 없는 돈을 내고, 짐을 더 버렸다. 다 버려버리고 싶었다. 두 번 다시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난 그렇게 지옥을 탈출했다. 

시에라리온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직항은 없다.  난 그런 최단거리 경로를 계산하거나 그럴 여지가 없었다. 일단 아프리카에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빨리 돌아오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돌아올 수 있었던 유일한 항공은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한참을 돌아오는 방법이었다. 당시 내 두 다리에는 12군데 정도 염증으로 곪아서 고름이 나오고 있었다. 아프리카는 더위가 문제가 아니다. 건기가 지나고 우기가 오면 그때의 병균과 벌레가 공포의 대상이다. 난 벌레에게 물리고 물리고 긁고, 어느 순간을 상처를 긁다보면, 손톱에 벌레가 끼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에서 30시간 정도 체류했다. 돈도 없고, 짐도 없고, 더러운 상처투성이 인체로 그렇게 공항의 한 구석에 숨어 있었다. 예수가 33살에 죽었다고 했던가. 난 33살에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하고 방향을 잃은채 십자가에 매달려 죽거나, 자연증발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입국했다. 집에 오면서 바라본 한국은, 떠날 때완 다리, 숨막힐정도로 답답하고 두려운 곳으로 변해있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땐 난 희망과 열정, 의지, 기대 등의 감정으로 출국했지만, 난 죽은 체로 귀국했다. 두려웠다. 난 어디로 가야할까? 엄마와 여동생은 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난 어디에 숨을 수 있을까? 성경의 엘리야가 숨을 곳을 찾았던 것 처럼,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죽고 싶었다. 아니 난 죽을 용기가 없었을 뿐 죽어 있었다. 죽을 용기가 없었을 뿐. 삶이 힘들면 의미 따위는 사치다. 삶에 명료한 것 하나만 있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모든 것이 모호하고 불분명하면 살아갈 수 없다. 난 그렇게 아프리카에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오고 마음 속에 있었던 감정은 엄마를 향한 미안함이었다. 지금까지 최고는 아니여도 최선으로 길러주신 어머님께 너무 죄송했다. 가출하고, 유학까지 서포트해주셨지만 병신이 되어서 돌아온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면 내 마음보다 더 아팠다. 난 죽고 싶었다. 포기하려고 한 게 아니라, 포기했다. 그 어떤 명료함이 없는 모호함, 무정형의 모순들, 아무것도 모른 체 살 수 있나? 자신이 없었다. 그냥 내가 정신병자 같았다. 난 집에서 네 발로 기어다녔고, 씹는 음식은 아예 먹지도 않았다. 말은 하지도 않았고, 방에 누워서 울었다. 소리 내어 우는 것도 1시간 이상 못한다. 소리 내지 않고 계속 울었다. 난 그렇게 내 방에서 소리없이 포기한 채 존재했고, 울었다. 그리고 우는 것도 포기했다. 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칼을 들고 생각했다.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엄마와 동생은 집안에 있는 날카로운 것들을 모두 내다 버렸다. 2달 정도 지났을까? 새벽에 다시 소리내어 울었다. 엄마와 동생과 택시를 타고 연세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갔다. 야간 근무 중인 레지던트는 할 수 없는게 없다고 했고, 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에서 난 다시 울었다. 집밖으로 나갈 수도 사람들을 만날 수도 어떤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동생에게 미안했다. 엄마는 내가 없었으면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동생은 나 같은 오빠가 없었다면 더 편하지 않았을까? 난 누굴까? 왜 태어났을까? 왜 죽을수 없는 걸까? 

 

 

 

이때의 나는 직업도 돈도 미래도 
아프리카에 가서 죽더라도 내 열정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면 내가 날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누구일까? 이 어려운 질문, 
난 내가 꿈꾸는 비전, 꿈, 혹은 소명 따위를 내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내 손으로 만들고 싶었다. 아니, 만들지 못하더라도 미완성이라도 시도하고 싶었다. 결국 끝날지 알면서도 어제 보다 좀 더 나은 오늘을 만들려고 한 우리에게 있는 그 프로그램, 난 오늘 죽더라도 날 발견하고 싶었다. 날 발견할 수 없더라도, 신이 있다면 명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명료함. 명료함. 데카르트, 칸트, 흄, 카뮈 그 모두가 원했던 명료함. 그것이 필요했다. 

 

 

아프리카로 가기 전에 
"내가 가는 길은 오직 주가 아시나니, 내가 정금같이 나가리라."


아프리카에서 나오기 전에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아프리카에서 돌아오고 난 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신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했지만, 신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신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