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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 하정우

by mubnoos 2025. 1. 9.

 

 

웬만하면 걸어다니는 배우 하정우입니다

 

 

 

나에겐 머리만큼이나 큼직한 신체부위가 있다. 바로 두 발이다. 내 발 사이즈는 300밀리미터다.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것. 

 

나는 걸음수를 측정하는 핏빗을 손목에 차고, 시간이 가듯 나의 걸음이 마일리지로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내 인생 최고의 흥미진진한 게임으로 여기며 걷는다. 

 

사람마다 보폭이 다르고, 걸음이 다르다. 같은 길을 걸어도 각자가 느끼는 온도차와 통점도 모두 다르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잘못된 길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더디고 험한 길이 있을 뿐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길 끝에서 허무함을 느낀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걷기가 주는 선물은 길 끝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내 몸과 마음에 문신처럼 새겨진 것들은 결국 걸어가는 길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길 위의 매 순간이 좋았고, 그 길 위에서 자주 웃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길 끝에서 느낀 거대한 허무가 아니라 길 위의 나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왜 하루하루 더 즐겁게 걷지 못했을까. 다시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왜 사람들과 더 웃고 떠들고 농담하며 신나게 즐기지 못했을까. 어차피 끝에 가서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 텐데.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길 위에서 만난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단순하게도 인간은 몸을 움직이는 만큼 수면의 질이 높아지는 것 같다.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려나가기로 했다. 그림도, 또 내 인생도.

 

일과 휴식을 어중한하게 뒤섞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을 휴식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 일이 바쁠 때 나중에 몰아서 쉬어야지 같은 얼토당토 않는 핑계를 대지 않는 것. 

 

10만보 걷기란 약 84km를 하루만에 걷는다는 것이다. 마라톤 풀코스의 두 배 정도 되는 거리이고 보통 걸음으로 약 20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결코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고통보다 사람을 더 쉽게 무너뜨리는 건, 어쩌면 귀찮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다 견뎌내면 의미가 있으리라는 한줌의 기대가 있지만, 귀찮다는 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하찮게 느껴진다는 거니까. 이 모든 게 헛짓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차오른다는 거니까. 

 

왜 걷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그 의미란 걸 찾아면서 포기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때, 우리가 어렴풋하게 찾아헤맨건 이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고, 이 길을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부정하며 포기할 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거다. 이것은 꼭 걷기에 고나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유난히 힘든 날이 오면 우리는 갑자기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 사실 처음부터 다 잘못됐던 것이다 라고 변명한다. 이런 머나먼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아 일단 계속 가보아야 하는데, 대뜸 멈춰버리는 것이다. 

 

걷기의 매력 중 하나는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웃기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지면 이미 그 농담은 실패한 것이다. 유머는 삶에서 그냥 공기처럼 저절로 흘러야 한다. 마음에 여유가 부족하면 이런 유머가 나오기 어렵다. 

 

나는 LG트윈스, 텍사스 레인저스를 응원한다. 특히 추신수 선수의 팬이다.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하루에 20쪽 정도 책 읽을 시간, 삼십 분 가량 걸을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만약 어떤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다면 후회나 미련이 생기지 않기 떄문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열심히 보낸 시간 자체가 나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감이란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열심히 한 일을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