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걸어다니는 배우 하정우입니다
• 나에겐 머리만큼이나 큼직한 신체부위가 있다. 바로 두 발이다. 내 발 사이즈는 300밀리미터다.
•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것.
• 나는 걸음수를 측정하는 핏빗을 손목에 차고, 시간이 가듯 나의 걸음이 마일리지로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내 인생 최고의 흥미진진한 게임으로 여기며 걷는다.
• 사람마다 보폭이 다르고, 걸음이 다르다. 같은 길을 걸어도 각자가 느끼는 온도차와 통점도 모두 다르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잘못된 길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더디고 험한 길이 있을 뿐이다.
•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길 끝에서 허무함을 느낀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걷기가 주는 선물은 길 끝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내 몸과 마음에 문신처럼 새겨진 것들은 결국 걸어가는 길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길 위의 매 순간이 좋았고, 그 길 위에서 자주 웃었다.
•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길 끝에서 느낀 거대한 허무가 아니라 길 위의 나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왜 하루하루 더 즐겁게 걷지 못했을까. 다시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왜 사람들과 더 웃고 떠들고 농담하며 신나게 즐기지 못했을까. 어차피 끝에 가서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 텐데.
•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길 위에서 만난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 단순하게도 인간은 몸을 움직이는 만큼 수면의 질이 높아지는 것 같다.
•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려나가기로 했다. 그림도, 또 내 인생도.
• 일과 휴식을 어중한하게 뒤섞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을 휴식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 일이 바쁠 때 나중에 몰아서 쉬어야지 같은 얼토당토 않는 핑계를 대지 않는 것.
• 10만보 걷기란 약 84km를 하루만에 걷는다는 것이다. 마라톤 풀코스의 두 배 정도 되는 거리이고 보통 걸음으로 약 20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결코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 고통보다 사람을 더 쉽게 무너뜨리는 건, 어쩌면 귀찮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다 견뎌내면 의미가 있으리라는 한줌의 기대가 있지만, 귀찮다는 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하찮게 느껴진다는 거니까. 이 모든 게 헛짓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차오른다는 거니까.
• 왜 걷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그 의미란 걸 찾아면서 포기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때, 우리가 어렴풋하게 찾아헤맨건 이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고, 이 길을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부정하며 포기할 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거다. 이것은 꼭 걷기에 고나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유난히 힘든 날이 오면 우리는 갑자기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 사실 처음부터 다 잘못됐던 것이다 라고 변명한다. 이런 머나먼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아 일단 계속 가보아야 하는데, 대뜸 멈춰버리는 것이다.
• 걷기의 매력 중 하나는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 웃기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지면 이미 그 농담은 실패한 것이다. 유머는 삶에서 그냥 공기처럼 저절로 흘러야 한다. 마음에 여유가 부족하면 이런 유머가 나오기 어렵다.
• 나는 LG트윈스, 텍사스 레인저스를 응원한다. 특히 추신수 선수의 팬이다.
•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하루에 20쪽 정도 책 읽을 시간, 삼십 분 가량 걸을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 만약 어떤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다면 후회나 미련이 생기지 않기 떄문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열심히 보낸 시간 자체가 나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감이란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열심히 한 일을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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