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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리는 무늬 / 최진석

by mubnoos 2024. 10. 29.

 

 

인문의 숲 속으로 들어가며 - 저기, 사람이 내게 걸어 들어오네

• 크게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들은 대개 이런 투로 말합니다. 좋아서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죠. 

 

 

 



첫 번째 인문의 숲 - 인문적 통찰을 통한 독립적 주체되기

 

• 인문학은 개인이나 국가의 진정한 '독립성'과 깊이 관련됩니다. 주도권을 잡으려는 노력의 표현인 것이지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단지 '좋다'라거나 '나쁘다'일 뿐이라면, 분명 여러분은 리더가 되려는 준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근대가 실체관이라면 현대는 관계론입니다. 양자물리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인문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입니다.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기억, 즉 이념이나 가치관이나 신념을 벗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요? 오직 자기 자신만 남습니다. 자기가 온전히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것이지요. 자기로만 남은 이 사람에게는 인간이 그려 나가는 무늬가 새로운 것으로 드러나고, 그러면 이 무늬가 어떻게 그려질까.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어떤 폭으로 움직일까를 꿈꿔볼 수 있습니다. 상상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가장 원초적이며 단순한 욕망조차도 무언가 불확실합니다.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거예요. 즐거운지, 재미있는지, 슬픈지를 자기가 모르는 거예요. 지금 자기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도 말이죠. 가장 원초적인 욕구조차도 추측해야 하고 불확실한데,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지금 뭘 원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죽음 사람이에요.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자기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성취도 이룰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인문의 숲 - 인간이 그리는 무늬와 마주 서기

 

• 버릇이 없다는 말은 어른들끼리 만들어 놓은 어떤 틀 안에 그 아이들이 아직 들어가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이들한테 버릇이 없는 것은 아이들 잘못이 아니에요. 이건 아이들의 직업이에요. 아이들은 버릇이 없어야 해요. 왜냐? 그렇게 태어났으니까요. 아이들이 버릇을 만들었나요? 그 버릇이 제조되는 과정에 아이들은 한 번도 참여해 본 적이 없잖아요. 그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혹은 자신들만의 새로운 버릇을 만들 수 있도록 기다려줘야 합니다. 

 

독립적 주체의 확립 없이 창의성은 불가능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개념이 아니라 사건이다. 

 

멋대로 해야 잘할 수 있다. 

 

지식은 사건이 남긴 똥이다. 

 

우리가 인문적 통찰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지점은 어디냐? 행복입니다. 갈등 속에 휩싸이지 않게 해줍니다. 더욱 아량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해줍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헌신하도록 인도해 줍니다. 상상력이나 창의성이 넘치게 해줍니다. 이념과 가치관과 신념의 체계를 벗어 던지고 인문적 통찰의 길로 진입하는 순간 신념 체계를 벗어 던지고 인문적 통찰의 길로 진입하는 순간 오로지 자기만 우뚝 서 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생명력이 충만한 오로지 자신만의 욕망이 드러납니다. 순수한 자기 욕망이 지식에 매몰되지 않고 그 지식을 딛고 지혜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욕망입니다. 나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줄 수 있는 의지, 생명력, 동력, 충동입니다. 

 




세 번째 인문의 숲 - 명사에서 벗어나 동사로 존재하라

• 하고 싶은 말을 안 할 수 있는 힘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한 자는 알지 못한다. 진정한 앎에 도달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내용을 언어화 하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는 다 짐승이지요. 

 

 



네 번째 인문의 숲 -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삶의 궁극처를 지향하는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예민함을 유지한다는 말이지요. 이론이나 체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사람도 예민함을 유지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민함을 유지하며 깨어 있는 사람의 눈빛이 굳이 저 먼 곳을 향할 필요가 없지요. 바로 지금 여기가 새롭게 눈으로 들어오고, 거기서 세상이 읽혀지기 때문입니다. 

 

돌아봐야 합니다. 익숙했던 것을 낯설게 만들어서 마주한다는 것, 힘든 일이죠. 그것이 엄청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해내야 합니다. 그래야 '경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근데 저는 여기서 다른 말 하나를 더 붙이고 싶어요. '용기'라는 말입니다. 철학이 경이로움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하지만, 그 경이로움을 생산하는 창조적 계기는 바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불안을 이겨내고, 돌아보려고 용을 쓰던 바로 그 힘이지요. 그 힘이 바로 용기가 아닐까요?

 

왜 상상력이 부족한가? 질문을 시도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문의 숲 속에 머물며 - 욕망으로 새기는 인간의 무늬

 

• 욕망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최전선입니다. 삶의 무늬는 죽으나 사나 나의 무늬여야 합니다. 이는 선택이 아니라 그냥 그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