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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사다리 / 공지영

by mubnoos 2021. 1. 28.

1부 제 영혼이 밀랍처럼

 

누구나 살면서 잊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다. 고통스러워서 아름다워서 혹은 선연한 상처 자국이 아직도 시큰거려서.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뛰는 심장의 뒤편으로 차고 흰 버섯들이 돋는 것 같다. 9

 

소나무 가지 위에 쌓였던 눈꽃이 푸수수 흩어지고 이파리 없는 가지들이 바람에 가만히 흔들리는 소리. 깊은 땅속 고물거리는 벌레들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 나무뿌리들이 아주 조금씩 깊은 데로 가느다란 발을 뻗는 소리. 그때 내 귀를 스쳐 가던 여린 바람 소리는 지구가 자전하면서 내는 마찰음이었을까? 우주가, 신이 혹은 인간의 생이 아주 가녀리게 자신을 드러낼 것만 같은 순간들이 바로 그런 때였다. 그럴 때 가끔 내게 하늘이 홀연히 열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 같은 것이 가슴으로 쏟아져 내렸다. 11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전원을 끄는데 저잣거리에 서 있던 내 청신경의 스위치를 누군가 차단한 듯했고 순간 마음의 기압이 변하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음 같은 것이 무중력의 목울대로 차올랐다. 이렇듯 소란의 커튼이 젖혀지자 침묵이 다가왔다. 침묵은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내 뼈와 살의 원천을 투시하는 어두운 거울 같았다. 그것은 일견 두려운 일이었다. 수도 생활을 각오하며 그 고요함을 동경했으나 침묵의 이 막강한 힘은 예측하지 못했었다. 13

 

나는 내 짧은 젊음을 기차에 두고 내린 것 같았다. 소음들과 소망을, 열락과 구토를, 초조와 울음을, 선망과 질투들을….다시 길고 부드러운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로 한 발을 내딛는데 젖혀진 소음의 휘장 틈으로 처음 알몸뚱이의 내 영혼이 언뜻 보였다. 14

 

그때 그렇게 긴 대걸레를 밀면서 오던 그의 모습은 내게 참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서향으로 난 유리창에 걸러진 석양빛이 복도에 고인 어둠을 부드럽게 만들고 그는 그 안을 천천히 헤엄쳐 오는 성스러운 물고기 같았다. 15

 

누가 그랬다. 당신의 약점을 찾고 싶으신가요? 결코 당신을 웃게 하지 못하는 문제를 찾으면 됩니다. 21

 

아니 어쩌면 나는 그 종소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새벽하늘, 푸르스름한 빛 속에 종탑이 우뚝 솟아 있고 종소리가 퍼져가고 있었다. 새벽의 찬 기운을 피하려고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올려다보면 그것은 이 지상에 유일하게 허락된 영원에의 통로, 야곱이 보았다는 그 사다리가 소리를 타고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만져볼 수도 붙들 수도 머물 수도 없으나 분명히 거기 있는, 그런. 23

 

수도자는 순명해야 하고 수도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인간(humanitas), 흙(humus), 겸손(humilitas)은 모두 같은 라틴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25

 

그 떠오름의 정체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분명 구체적인 한 인간에 대한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건 아마도 그리움이었으리라. 두고 온 곳, 가 닿을 수 없는 곳, 돌아가지 못할 곳에 대한. 아직도 나의 마음 한 자락은 두고 온 세상에 걸쳐 있었고 기차가 지나가면 철길의 꽃이 흔들리듯 따라서 흔들렸다. 30

 

그레고리안 성가(1,500년 된, 반주 없이 사람의 목소리로만, 모든 음계를 가장 단순화해서, 두 손을 낮게 맞잡고, 겸손한 자세로 불러야 할 것 같은, 음악이 된 기도, 침묵이 되고 싶어하는 소리!) 43

 

그렇게 또 강물이 흐르고 기차가 떠나고 종소리가 쏟아졌다. 계절이 오고 갈 때마다 비가 내렸고 수도원 한쪽에 흰 광목 빛깔 산목련이 여덟 번을 피고 졌다. 45

 

“우리 엄마 갈아 계실 때 그러셨어요. 언제든 엄마는 내가 옳다고 하셨죠. 사춘기 들어서 제가 한번 엄마한테 물었죠. 엄마 말은 믿을 수가 없어. 엄마는 맨날 내가 옳다고 하잖아? 하니까 엄마가 그러셨어요. 그러니? 미안하구나. 하지만 난 언제나 네가 옳은 거 같아. 난 솔직히 뭐가 옳은 건지 잘 모르겠다, 안젤로. 하지만 혹여 네가 잘못한다 하더라도 네가 옳다고 해주고 싶어. 그래야 네가 정말 잘못했을 때 혼자 잘못한 듯 외로워지지 않을 거잖아. 저 그 후로 엄마 말 많이 생각했어요. 내가 미카엘 수사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냥 같은 편이 되어주고 싶어요. 혼자만 잘못한 겉같이 너무 외롭지 않게” 68

 

‘부자가 재산을 자랑할 때 약탈과 착취가 묵인되고, 군 지휘관이 승전보를 알릴 때 대량 학살이 묵인되고, 고관대작이 권력을 뽐낼 때 폭력이 묵인되어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이것들이 그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자신도 그 부류 속에 있음을 의심하라!’하고 톨스토이가 말했던가. 71

 

그때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에서 나는 누군가의 일기장을 들춰본 듯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어떤 깊은 호수의 밑바닥 모래 속에 반쯤 잠긴, 오래 전에 그리로 떨어져 내렸을 작은 보석 상자를 본 듯했고, 언뜻 나부낀 베일 뒤에서 남몰래 흐느끼는 한 사람을 본 것 같았다. 작음 소름 이 내 마음 언저리로 파문처럼 지나갔다. 모르겠다. 나는 그때 그녀를 많이 알게 되었다고 느꼈다. 82

 

그때 소희가 검은 눈을 들어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얼결에 날아오는 공을 받아버린 것처럼 나는 그 눈길을 받았고 그리고 포획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영원이라는 것이 있을까. 영원이란 시간이 정지된 것 혹은 시간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 것. 과거가 미래를 규정하지 못하는 것. 만일 그렇다면 그때 나는 이미 영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한다.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커다란 포도 알 같은 그녀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104

 

“베드로야, 네가 젊었을 때는 제 손으로 띠를 두르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 그때는 남이 와서 팔을 벌리고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라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111

 

그날 저녁기도 후에 미카엘은 우리에게 다가와 말했다. “말하기로 했어. 내가 세운 규칙이 얼마나 부질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나는 내 부족함을 울기로 했어. 나는 내가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슬픈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115

 

 

 

2부. 빈 들에 나가 사랑을

 

나는 홀리듯 다시 수도원 뜰로 나섰다. 달은 만월이었다. 온 세상에서 단 하나의 커다란 빛만을 허용할 때 신기하게도 만강에 달빛이 어리고 만 가지 잎사귀와 조약돌에 빛이 깃든다. 어둠이 짙은 것은 오히려 수많은 잔 불빛들로 현란한 도시의 밤들 쪽이라는 것을 나는 이 수도원에 들어와 알았다. 135

 

사람은 가도 나무는 거기 오래 남아 있으리란 것을 알았다면 나는 차마 그곳에 그렇게 무모하게 나의 추억을 걸쳐놓지 못했으리라. 137

 

손에 맥주 캔 하나씩을 들고 우리는 강가의 벤치에 앉았다. 달에서 흘러나오는 은빛 가루가 온 세상을 덮은 듯했다. 우리가 자는 동안 세상은 다른 향 기에 절여져 발효되고 있는 듯했다. 그녀와 이 밤 강가에 앉아 잇는 것이 꿈만 같았다. 소희는 벤치에 앉아 발을 달랑거리다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콧날이, 흰 이마의 실루엣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140

 

가끔씩 평범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운명을 대답해야 함을 느낀다. 갑자기 벼랑 끝에라도 선 듯 많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내가 무난한 대답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내게 배반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탈을 시인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중단과 거짓의 편에 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운명의 노크 소리처럼 그것은 내게 진실과 거짓 양쪽 중에 선택을 강요하는 듯 했다. 143

 

언제나 느끼는 것이었지만 존재를 뒤흔드는 고통을 통과한 자의 눈동자는 투명하고 두려움이 없다. 투명하고 두려움이 없는 것은 무엇이든 사물을 꿰뚫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어린아이의 무연한 눈동자가 그러하듯 말이다. 143

 

신은 왜 노아의 홍수를 일으키고 나서 무지개로 자신의 행위를 반성했을까. 다시는 물로 세상을 휩쓸어버리지 않겠다고.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바랐을 것이다. 이 비가 세상을 끝장내주기를. 그저 물로 휩쓸어 다 사라져버리기를. 완벽한 무력, 완벽한 수동태의 자세로 나는 앉아 있었다. 그녀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기도했지만 그녀를 위해 살아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148

 

“아까 미안해.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결심하고 그렇게 모질게 말하면 그렇게 될 줄 알았어. 그러지도 못할 거면서, 겨우 하루도 못 참고 이렇게 무너질 거면서… 그런데 짐을 싸면서 알아 버린 것이야. 내가 네게 모질게 말할 수 있었던 건, 헤어지자 말하자고 만난 거긴 하지만 아직도 네가 내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그래서 내가 강한 척이라도 할 수 있었다는 걸. 이제 네가 정말 없다고 생각하니까 강한 척도 할 수 없었다는 걸.” 158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어떤 궁극적인 의미, 다시 말해 초월적인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 인간은 그 초월적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그저 믿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람이다.” 훗날 나는 빅토르 프랑클이 죽음의 수용소를 체험하고 나와 죽기 전에 쓴 그의 자서전에서 이와 같은 글을 읽고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한 적이 있었다. 170

 

태어나기 전에 인간에게 최소한 열 달을 준비하게 하는 신은 죽을 때는 아무 준비도 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삶 전체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성인들이 일찍이 말했던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생각하는 인간은 분명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안다. 173

 

묘석에는 다음과 같은 라틴어가 쓰여 있었다. “HODIE MIHI, CRAS TIBE” 그건 이런 뜻이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184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종소리에 복수하는 기분도 있었다. 푸른 새벽, 주전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하얀 입김을 뿜어내면서 종소리를 올려다보면, 그때 종소리는 하늘에서 풀어져 내려오는 줄사다리 같았다. 그걸 타고 오르면 천사들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환영을 느끼던 그 어린 수사는 이제 없다. 그때 나는 저 종소리를 따라 기도하던 젊은이 두 명을 하늘이 그토록 무자비한 방법으로 데려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209

 

“미안하지만 너희를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아. 너희는 모르지. 정신의 기쁨을 위해 희생되는 육체의 어떤 뿌듯함을. 힘듦을 참으며 양보하는 손길의 따스함을. 죽음 너머의 삶을 생각하는 우리의 존엄을. 죽음 후에도 계속되는 우정과 그리움을. 그래 설사 죽고 난 후에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발견 하고 내가 내 삶을 돌아본다 해도 나는 너와 나 중에서 학대하는 자의 역할은 맡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나는 너희를 조금도 부러워할 생각이 없어. 또 한 너희가 우리를 두고 하는 이 조롱에 조금도 동의할 생각이 없어.” 248

 

 

3부. 그러면 제가 살겠나이다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호함이다. 모호함 중에서도 진한 불행의 기미를 가진 모호함이다. 사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 그것도 그 사건의 여파에 대한 불신, 모호함 때문이며, 그보다 더, 가족의 죽음보다 더 실종이 고통스러운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 것은 차악의 희망인 체념조차 불가능하게 하니까. 260

 

사랑의 포탄은 그것이 터져버렸을 때 모든 세상을 황무지로 바꾸는 힘을 가진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하늘은 흐렸고 태양은 빛을 잃었으며 오직 피를 진득하게 굳게 하는 뜨거운 태양만이 시련처럼 떠올랐다. 세상은 희미한 무채색이었으며 어떤 것도 나를 가슴 뛰게 하거나 웃게 만들지 못했다. 268

 

시간이 마모시키는 것은 비본질적인 것들이라는 것을. 진정한 사랑은 마모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정한 고통도 진정한 슬픔도 진정한 기쁨도. 시간은 모든 거짓된 것들을 사라지게 하고 빛 바래게 하고 그 중 진정한 것만을 남게 한다는 것을. 거꾸로 시간이 지나 잊힌다면 그것은 아마도 진정에 가 닿지 못한 모든 것이라는 것을. 290

 

그녀에게 조종당하고 희롱당하는 것 같아 미친 듯이 분노가 치밀었다. 분노의 힘으로 겨우 수도원을 향해 다시 몸을 돌렸다. 역을 지나 수도원 담장을 걸어가는데 종소리가 울렸다. 종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그 육중한 쇠의 무게로 말라버린 우물 바닥 같은 내 가슴밑바닥을 우두두두 훑고 지나갔다. 그 육중한 쇠에 긁히는 마른 자갈 바닥처럼 마음이 아팠다. 내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번져 나왔다. 내리쬐는 햇볕은 시련처럼 뜨거웠고 머릿속이 말라붙는 우물 속 같았다. 나는 걸음을 잘 옮길 수가 없었다. 나는 수도원 담벼락을 한 손으로 짚으면서 병자처럼 절룩였다. 299

 

나는 토마스 수사님의 목에 냅킨을 두르고 그의 입에 전복죽을 떠 넣었다. 굳어진 입술 때문에 반쯤은 흘러내렸고 나는 그것을 다시 숟가락으로 훑어 그의 입에 넣었다. 춤을 추러 다녔다는 그의 젊은 날이 어른거렸다. 한국으로 떠날 때 기차역에서 무너져 우는 어머니를 두고 떠나던 젊은 그가, 한국 말을 배우던 그가, 어린아이들과 놀아주는 젊은 수사였던 그가, 북한군에게 끌려가던 그가, 돼지라고 불리며 학대당하던 그가, 친구 요한 신부의 시체에서 구더기를 떼어내면서 울부짖던 그가, 그 맑은 얼굴로 스쳐 지나갔다. 304

 

돈! 어디에나 있고(omnipresence),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omnipotence), 누구에게도 다는 온전히 소유되지 않는, 딱히 실체가 없으면서도 분명히 존재하며 모든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때로는 삶과 죽음을 무자비하게 가르는, 신의 속성을 고스란히 가진 지상의 유일한 그것. 그리하여 쉽게 신과 대치되고 혼동되며 천국의 입구로 가는 입장권이라고 불리는 그것. 316

 

“제 기도는 먼지보다 미약할지 모르지만 어느 날 신부님의 소망이 이루어질 힘이 먼지 하나의 무게만큼 딱 모자랄 때 제 기도가 신부님께 보탬이 될 거라 믿을 뿐입니다.” 321

 

“참나무란 참나무 속에 속하는 여러 나무들의 공통 명칭이라는 것을. 자료를 좀 찾아보니까 수피를 잘라내어서 굴피집의 지붕으로 썼다는 굴참나무, 떡을 상하지 않게 감싸주었다는 떡갈나무, 예전에 신발깔창으로 대기 좋았다는 신갈나무, 묵을 쑤어 먹으면 제일 맛있는 열매를 맺는다는 졸참나무, 거기서 열린 도토리로 임금님 수라상에 올릴 도토리묵을 쑤었다는 상수리나무…한마디로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가 다 참나무라는 거야.” 327

 

누군가 그랬다. 수도생활은 포기하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나서 다시 또 포기하고 기도하고, 또 포기하고 기도하고… 그 말씀을 듣던 할머니 가 그랬다. “수도 생활만 그렇겠니? 사는 게 그렇단다. 포기하고 기도하고 포기하고 기도하고… 밤새 포기한다고, 버리겠다고 기도하고 그러는데 아침에 일어 나면 밤 사이에 누가 다시 주워다가 그 욕망들을 다시 내 안에 넣어놓는지 나는 다시 처음부터 비우고 버린단다. 매일 말이다.” 332

 

시간은 모든 것을 마모시킨다.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결국 젊음도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마모되니까. 그러나 그들을 향한 내 마음은 마모 되지 않았다. 내 사랑은 진심이었다. 387

 

 

작가의 말

“삶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같다.” 이 구절을 떠올리자마자,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찾아온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가 했던 유명한 말 중의 하나라는 것을 기억해내자 내 입은 나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냈다.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이 구절을 떠올리려고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수습할 사이도 없이 눈물이 핑 돌았고, 들을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깐 그렇게 누워있었다. 삶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 같았다는 것을 나도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게다.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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