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도회사 East India Company
17세기 초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이 자국에서 동양에 대한 무역권을 부여받아 동인도에 설립한 무역회사의 통칭
책머리에 - 동방으로의 유혹
ㆍ산업혁명 이후, 상업혁명 시대를 움직인 것은 바로 동인도회사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상업적으로 연결하는 동인도무역에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과 같은 나라가 참여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제1장 계속되는 동인도회사의 설립
ㆍ네덜란드는 영국에 비해 시작은 늦었지만 평화적인 상업거래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후추거래에 있어서는 한 발 앞서 있었다.
ㆍ주주의 책임이 유한책임제였던 것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근대적 성격의 회사로 평가할 수 있는 점이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회사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출자한 주권만큼만 회사에 공한하고 개인 사유재산은 침해받지 않는 형태였다. 이런 의미에서 1602년에 세워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후 유럽 여러 나라에서 설립되는 주식회사의 본보기가 되었다. 유럽이든 아시아든 아직 이에 필적할 만한 뛰어난 조직을 가진 기업은 없었다. 따라서 네덜란드인들은 그와 같은 기업의 선진성을 살려, 적어도 17세기의 100년 동안은 이슬람 상인을 비롯한 아시아 각지의 상인들은 물론 선두 포루투갈과 뒤따라온 영국을 누르고 동인도무역을 유리하게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ㆍ영국의 역사가 박서는 200년에 걸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역사를 통라보면서 17세기는 황금의 시대', 18세기는 '허상의 시대'라고 요약하고 있다. 사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있어 17세기는 절정의 시대였던 반면. 18세기는 아무리 봐도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의 공허한 시대였다
ㆍ18세기 절정기를 맞은 것은 영국 동인도회사였다.
ㆍ영국 동인도회사는 한 번 항해할 때마다 자금을 모으고 배가 화물을 싣고 귀국하면 그 수입품 혹은 수입품 판매대금을 투자액에 비례해서 주주에게 분배하는 방식, 즉 개별항해의 시대를 열고 있었다. 매 항해 때마다 원금과 수익금을 합친 것 모두를 주주에게 배분했던 것이다. 물론 배가 무사히 귀환하지 못해 배당금이 한푼도 없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있었다.
ㆍ동인도회사의 대표는 영국과 네덜란드였다.
제2장 후추와 향료의 수입
ㆍ영국 동인도회사의 설립목적은 당시 영국에서 생산되고 있던 모직물을 판해하는 것이었다.
ㆍ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향신료 무역의 대표 회사로 연구자 사이에서도 인정받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스파이스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주요 거래품이었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이 스피아스를 후추보다 수십 배 이상 귀중하게 여겼다. 좁은 의미로 스파이스란, 글라망도 기록하고 있다시피 '장향유'와 '육두구'를 가리키는데, '육두구 꽃'인 메이스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 중 정향나무는 인도네시아 동부 몰루가 제도의 텔나테, 타도레, 마이캉, 모티, 바찬 등 다섯 개의 섬이 주산지로, 세계 다른 어느 곳에서도 자라지 않는다. 6-9m 높이의 나무로, 나무 전체가 향기를 발산한다. 육두구는 이 몰루카 제도의 남쪽에서 약간 동쪽에 있는 반다제도가 주산지인데, 역시 다른 곳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메이스는 육두구의 꽃이므로 이 역시 마찬가지다. 이 외에 실론 섬에서 주로 자라는 계피들 이들 다음으로 귀중하게 여겼는데, 대항해시대의 유럽 사람들이 몰루카 제도를 탐험과 발견의 목적지로 삼은것은 정향유와 육두구 때문임에 틀림없다.
ㆍ후추와 스파이스를 유럽에 독점 공급하기 위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적극적으로 인도네시아에 진출했다. 1605년에 암본 섬의 포루투갈 요새를 탈취하고, 1611년에는 자바 섬의 자카르타에 상관을 설취했다. 1614년에는 얀 피텔스폰 쿤이 바타비아라고 개명된 인도네시아산 스파이스와 후추에 대한 노골적인 독점적 매점정책이 수행되었다. 영국은 회사 설립 초기부터 자바 섬에 진출해서 마침내는 향신료 제도에 도달했다. 프라 룬 섬은 반다 제도 중의 하나로서, 앞에서 말한 대로 육두구와 메이스의 산지이다. 영국은 1616년에 이 섬에도 진출했다.
ㆍ아시아무역의 막대한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중간이윤을 다른 사람들에게 뺏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영국세력뿐만 아니라 현지에 뿌리 깊은 세려을 갖고 있는 중국 상인, 말레이 상인, 자바 상인, 코로만델 상인 등의 개입을 배제시켜야만 했다. 반다 제도로부터 암본 섬, 몰루카 제도에도 함대를 보내 토착군주들을 위협해서 네덜란드와의 단독거래 계약을 맺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세계 다른 어느 곳에서도 생산되지 않는 정향유와 육두구를 독덤하려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네덜란드의 고압정책을 무엇보다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1623년의 '암본 학살사건'이었다. 암본 섬은 몰루카 제도와 반다 제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역시 향신료 제도의 주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1619년의 협정으로, 네덜란드 요새 안에 영국의 소상관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어느날 네덜란드인에게 고용되어 있던 한 일본인 용병이 네덜란드 보초병에게 말을 걸어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이를 두고 영국인들이 네덜란드에 대해 반란들 도모하기 위해 그 일본인을 고용하여 여러 가지 뒷조사를 하고 있었다며 꼬투리를 잡은 것이었다.
제3장 캘리코 수입과 중상주의
제4장 거대 주식회사
ㆍ1665년부터 1688년까지 영국의 국민소득은 8% 상승했고, 국부는 23%가 증가했다. 이와 같은 경제적 발전은 무엇보다도 외국무역의 확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외국무역이야말로 당시 영국의 경제발전을 선도하는 주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ㆍ상업혁명을 바탕으로 이 무렵의 영국에는 세 개의 무역회사가 사람들의 인기를 끌면서 주식회사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왕립 아프리카 회사', '허드슨만회사', '동인도회사'가 그것으로, 자본금의 크기를 보아도 3대 무역회사라고 할 수 있었다.
ㆍ주식회사의 배당금이란 원래 이익금, 즉 순이익에 해당한다. 따라서 고액 배당은 히사의 영업실적이 좋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ㆍ동인도회사 주식을 조작해서 최대의 이익을 얻은 사람이 바로 거대주주인 조사이어 차일드였다. 대량의 주식을 매점한 그는 동인도회사 총재로서 회사경영도 지배하고, 날조한 유언비어를 바람잡이 등을 고용해 퍼뜨려서 주가를 마음대로 조작했다. 그리고 제일 싼 가격일 때 매입하여 제일 비쌀 때 되파는 방법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차일드는 거액의 헌금을 이용해 국왕과 결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판은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제5장 동인도회사의 조직과 수입품목
ㆍ동인도회사의 상업적 업무는 향료와 목면, 차 등 인도 상품을 수입하고 그것을 런던에서 판매하는 것이었다.
ㆍ17세기 전반은 후추와 향료가 수입품의 주종이었지만, 세기 후반부터 후추 등의 비율은 떨어지고 목면과 견직류의 비중이 늘어났다. 그리고 18세기에는 차와 커피의 수입이 크게 증가하는데 이것이 18세기 동인도무역의 특징이었다.
제6장 남해회사
ㆍ동인도회사의 아시아 지역과의 무역이나 상업활동은 대서양과 지중해 지역의 활동과 어우러져 점점 더 활발해졌고 사람들의 기대도 아주 컸다. 목면, 견직물 외에 차의 수요도 영국 국내만이 아니라 유럽 각국에서도 증가 일변도를 달리고 있어 회사의 이익도 막대했기 때문이다. 동인도회사처럼 세계와의 폭넓은 무역이 아주 많은 이윤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 사회 일반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같은 이야기도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인도 등과의 무역으로 일확천금을 거머쥘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제7장 남해경기와 공황
ㆍ투기 조각의 시작 (남해 거품사건)
제8장 차의 수입과 중국무역의 시작
ㆍ원래 영국이나 유럽에는 차가 없었다. 아시아와 동인도 지역에서 수입되면서 차를 마시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ㆍ영국을 시작으로 유럽 각지에서 차와 커피, 거기에 초콜릿까지 소비되기 시작하며 점차 널리 보급되어가자, 부수적으로 도자기에 대한 수요도 증가해 갔다. 중국산 도자기에 대한 취향이 18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나면서 이것을 수입하는 일도 동인도회사의 업무가 되었다.
제9장 네이봅의 시대
제10장 무역상사에서 식민지 지배자로
ㆍ이 무렵 영국 동인도회사의 영업사원들이 인도 현지에서 행한 영업이라는 것이 실상은 협박과 약탈이었다고 말한다.
ㆍ상업혁명을 계기로 이루어진 영국 면직업의 비약적인 발전은 예전의 인도 면직업을 단숨에 파멸시켰다.
ㆍ본래 상업회사로 발족한 동인도회사는, 1813년 인도무역 독점 폐지와 1833년 중국무역 독점 폐지로 인해 존립기반이었던 무역독점권을 최종적으로 읽게 되었다. 본국에서 진행되는 산업혁명과 함께 산업자본가의 힘이 커져 가는 과정에서, 개인 무역업자와 무허가 상인들이 사실상 침범하고 있던 동인도회사의 독점 폐지를 추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제11장 동인도회사의 해산
ㆍ1833년에 있었던 동인도회사의 무역독점권 폐지는 자유무역상인들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ㆍ1833년 이후 동인도회사의 주요 수입원은, 인도 농민에게 선금을 주고 재배하게 한 아편을 매점하여 중국 광둥에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 수입은 동인도회사 수입 전체의 12%에 달하고 있었다.
ㆍ홍콩은 아편을 중국에 팔아넘기는 최대의 저장소 역할을 했다.
ㆍ세포이의 대반란이 진압된 것은 1859년 7월이 지난 후였다. 이 사이에 영국 동인도회사는 최종적으로 해산된다. 반란의 책임은 동인도회사의 운영방식에 있다고 하여, 이미 상업적 독점권을 잃어버린 회사로부터 인도 각지에 대한 통치권을 박탈하는 '인도 통치법'이 1858년 8월에 가결되었다. 1600년 12월에 특허장을 받으면서 발족한 동인도회사는 이것을 그 명맥이 끊어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인도는 1858년 11월 1일부터 영국 정부의 직접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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