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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사상의 진화 / 마이클 하트

by mubnoos 2021.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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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의미를 사건과 동일시하며 사건이 발생할 때 의미가 동시적으로 발생한다고 본다. 그는 스토아학파의 사건 개념을 받아들여 사건이 자연과 문화의 경계면, 표면의 가장자리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사건은 물체의 동적 발생과 함께 계열화 함로서 의미화 된다. 계열들이 모이면 구조가 형성된다.

 

한 사회, 한 시대에는 그 사회, 시대에 발생하는 사건들을 일정하게 계열화하는 통념이 존재한다.

 

​사건은 한 방향으로 계열화 한다. 하지만 그 사건은 다른 방향으로의 계열화도 잠재적으로 내포한다. 특이성의 세계, 잠재성의 공간은 바로 일정한 방향이 아닌 양방향이, 즉 sense가 아닌 non sense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로부터 일정한 방향성이 현실화된다.

 

​사회의 통념을 doxa라 한다. 이 통념을 거스르는 계열화를 우리는 Paradoxa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의 존재론은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일정한 코드, 즉 일정한 방향과 통념을 벗어나 무의미와 역설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들뢰즈는 무의미와 역설을 현실화할 수 있는 원초적 힘을 “욕망‘ 이라 부른다.

 

들뢰즈는 철학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1)상층-높이의 철학 - 플라톤적 철학
2)심층-깊이의 철학 - 자연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이다
3)대지-표면의 철학 – 스토아철학, 익살의 철학

 

스토아철학자들과 선불교의 선승들은 방망이를 사용한다. 삶을 형성하는 계열들이 이들을 옭아매려고 하면 그 계열들로부터 자리를 옮기고, 해학적인 익살처럼 이탈하여 doxa로부터 벗어난다. “익살의 철학”

  •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들 삶에 닥치는 사건들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느냐의 문제이다
  • 인간에 닥치는 가장 필연적이면서도 개별적인 사건은 죽음이다. 죽음은 모든 개체가 피할 수 없는 것, 가장 힘든 것. 가장 힘든 상처이고 가장 개별적인 것이다.
  •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비평형이다.
  • 기존의 완고한 모든 질서에 대한 금기를 위반하게 하는 것은 질서의 균형을 잃어버린 무질서 상태일 때 혁명이 일어난다

 

1부 들뢰즈의 철학사상 - 철학에서의 도제수업

서론 : 헤겔과 포스트구조주의의 기반들


내가 무엇보다도 혐오한 것은 헤겔주의와 변증법이었다- 헤겔은 가능성들의 한계를 만드는 사람이다.

 

들뢰즈가 동지로서 선택한 철학자들 - 베르그송, 니체, 스피노자

 

반헤겔, 포스트헤겔

 

존재의 선구성된 구조나 실존의 목적론적 질서를 일절 부정하고 있지만, 들뢰즈는 여전히 존재론적 사변의 가장 높은 평면들 위에서 작업하고 있다.

 

하이데거적인 존재론으로의 복귀와 구별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들뢰즈가 무엇이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오로지 표면적인 대답들만을 수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그는 존재의 깊숙한 혹은 감추어진 기반을 일체 거부하는, 엄밀하게 내재적이며 유물론적인 존재론적 담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들뢰즈의 존재에는 베일에 싸여 있는 것도 부정적인 것도 전혀 없다. 들뢰즈의 존재는 세계 속에서 완전히 표현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는 표면적이고 적극적이며 충만하다. 들뢰즈는 존재에 대한 일체의 주지주의적 설명, 말하자면 어떤 식으로든 존재를 사유에 종속시키고 사고를 존재의 최고 형식으로서 내세우는 일체의 설명을 거부한다.

 

니체에게 있어서의 역량이라는 주제는 베르그송의 존재론을 농동적 표현의 윤리학에 연결시키는 이론적 이행 통로를 제공한다. 스피노자는 이와 동일한 이행 통로에 걸쳐 있으며, 그것을 실천으로 확장시킨다. 니체가 사변의 긍정을 제기하는 것처럼, 스피노자는 실천 혹은 기쁨의 긍정을 존재론의 한가운데 제기하고 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긍정이 실천에 관한 존재론적 개념화라고 주장한다. 즉 스피노자는 실천이 존재를 구성한다고 파악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실천적 철학이 지닌 선비판적 세계에서 들뢰즈의 사유는 마침내 헤겔적 문제틀로부터 진정한 자율성을 발견한다.

 

 

예비적 논평 : 초기의 들뢰즈-몇 가지 방법론적 원리들

 

부정적인 것의 파괴, 긍정적인 것의 긍정
1)부정적인 것에 대한 공격 - 하나의 정치적 과제
2)철학의 중심적인 생산적 목적은 순수하게 긍정적이고도 창의적인 사회를 구축하는 것

 

들뢰즈 21세 논문 - 예수에서 부르주아지로

1)흄-베르그송 -> 2) 니체-스피노자

 

 

1장 베르그송의 존재론 : 존재의 긍정적 운동

베르그송의 차이는 우선적으로 존재의 공간적 차원이 아닌 존재의 시간적 차원에 관계한다.


존재가 필연적이기 위해서는 존재는 미결정적이어야 한다.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차이는 내부적 동력 (직관)에 의해 추동된다.

베르그송의 미결정 vs. 헤겔의 결정

모순은 차이에 대한 오독이다.

 

베르그송에게서 문제는 다자를 일자에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유형의 다양체를 구별하는 것이다.

차이는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과의 이러한 본질적 연관에 있어서 하나의 분화이다. 존재는 즉각적으로, 내내부적으로, 그 자신과 다르다. 존재는 타자를 바라보거나 매개의 힘을 찾기 위해 그 자신의 바깥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존재는 핵심부에서 생명이 자기 내부에서 담지하고 있는 내적인 폭발력으로부터 생겨난다. 분화의 생생하게 살아있는 과정은 존재의 실재적 실존과 순수한 본질을 연결시킨다.

철학자를 자연적 마디를 따라 칼질을 하는 훌륭한 요리사와 비교한다. 자연의 실재적 차이들에서 존재의 윤곽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철학자의 과제이다. 분화의 과정이 생명의 기초적 운동이기 때문이다.

분화가 결코 부정이 아니라 창조이며 차이가 결코 부정적이지 않고 본질적이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이라는 점을 보기 위해서는 현실적 항들을 생산하는 운동 속에 그것들을 복위시키고, 그 현실적 항들로 현실화되는 잠재성과 그것들을 관계짓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생의 약동에 의해 구성되는 분화는 새롭고도 처음과 똑같이 완벽한 마디를 낳는 창조적 과정이다.

 

 

 

2장 니체의 윤리학 : 내활적 역량에서 긍정의 윤리학으로

니체의 철학은 절대적 반 변증법을 형성한다.

 

스피노자
역량 = 덕 = 권리

 

모든 결정은 부정이다.

 

노동은 저지당한 욕망, 억제당한 소멸이다.

 

노예의 본질은 존재의 보편적 본질, 즉 순수한 자기-의식이다.

 

한번 던져진 주사위는 우연의 긍정이며, 그 주사위들이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항상 하라 - 존재로서의 영원회귀의 원리는 윤리적 의지처럼 내활적 의지이다.

 

기쁨의 철학은 필연적으로 실천의 철학이다. 그것은 의식의 탐구가 아니다. 긍정의 역량을 통한 외면성의 창조이다.

 

니체의 긍정에서 스피노자의 실천으로의 항해

 

 

 

 

3장 스피노자적 실천 : 긍정과 기쁨

 

스피노자적 정치학은 실천의 영역으로 옮겨진 베르그송적 존재론과 니체적 윤리학이다.

 

사변에서 실천으로, 긍정에서 기쁨으로

 

스피노자 - 사물이 더 많은 속성들을 가질수록 더 많은 실존을 갖는다.

 

대립이 아닌 다양성이 새로운 논리학의 공식이다.

 

감추는 것은 또한 표현한다. 하지만 표현하는 것은 여전히 감춘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순수 긍정의 철학읻. 긍정은 에티카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사변적 원리이다.

 

존재는 자기 자신의 질료인이자 작용인이며, 이러한 계속적인 자기-생산 행위가 존재와 더불어서 세계의 모든 실재적 결정들을 낳는다. 모든 결정은 부정이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무엇보다도 자발성이며, 발전의 능동적 원리이다.

 

스피노자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조차 모른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어떤 변용들을 할 수 있는지 우리의 역량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미리 알 수 있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정서는 무엇인지 탐구하라. 그리고 우리의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발견하라.

 

우리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이 능동적인 변용들로 채워져 있는 한에서만 참이다.

 

우연한 마주침들의 대다수는 슬프다.

 

긍정에서 기쁨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능동적이 되라, 절실하게 되라, 존재가 되라. Become being.

 

참된 자연법은 역량의 규범이지 의무의 규칙이 아니다.

 

 

 

 

4장 결론 : 철학에서의 도제수업

존재론, 긍정, 실천 그리고 구성

 

존재와 자연사이에는 어떠한 분리도 없다.

 

반대로 강력한 부정을 휘두를 줄 아는 사람만이 실재적 긍정을 주장할 수 있다.

 

스피노자적 비관주의는 정확히 기쁜 실천을 위한 출발점이다.

 

우리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신체들과의 마추침들, 즉 기쁜 수동정서들을 낳는 마주침들에 초점을 맞춘다.

 

기쁘기 때문에,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실성에 향한 길을 열어준다.

 

기쁘게 되라, 능동적이 되라.

 

 

 

 

 

2부 들뢰즈의 사회사상 : 자본주의와 분열분석

1장 『안티-오이디푸스』 읽기
1. 욕망하는-기계들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다. 존재는 노력이다. 존재는 흐름 혹은 생성이다.

 

기계들

 

모든 것은 기계적이다.
인간적, 기계적, 자연적인 것은 모두 하나이다. 이것들은 모두 생산의 과정들이다.
기계는 어떠한 주체도 어떠한 객체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혹은 적어도 자연적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생산과정이 시작되는 어떠한 원래의 지점도 없다. 모든 생산과 기계들은 다른 생산과 기계들의 결과이다.
기계는 과정이다.

 

욕망

욕망 같은 것은 없으며 단지 욕망하는 기계들이 있을 뿐 - 욕망하는 기계로서의 욕망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며, 생산 행위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단지 자신들의 생산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도 없고, 따라서 결핍된 대상도 지니고 있지 않다. 결핍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생산이나 노동은 기록되거나 코드화된 가치이다.

 

무의식의 존재는 생산이며, 표현은 그러한 본질의 소외 혹은 허구화이다.

 

인간의 사회적 실존이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혁명을 이끌어낸다.

 

 

 

2장 『천 개의 고원』 읽기

 

고통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새로운 얼굴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들뢰즈와 가따리가 제안하는 과정은 얼굴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unmake

 

어떤 정체성도 남겨두지 않는, 드러내야 할 어떤 비밀도 남아 있지 않는 드러냄이다.

 

생성은 결코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생성은 운동의 일종 혹은 스타일이다.

 

공리계는 실제로는 일종의 가짜 내재성, 억제되고 제한된 내재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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