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기

시지프 신화 / 알베르 카뮈

by mubnoos 2021. 10. 21.
728x90

 

ㆍ오, 나의 영혼이여, 불멸의 삶을 꿈꾸지 말고 기능의 영역을 남김없이 소진하라. 

 

 

 

 

 

 

 

 

부조리의 추론

ㆍ지금부터 다루게 될 내용은 금세기 곳곳에서 목격되는 어떤 부조리의 감수성이지, 엄밀히 말해서 우리 시대에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부조리의 철학이 아니다. 

 

ㆍ단지 이 책에서는 어떤 정신적 질병을 순수한 상태 그대로 묘사한 것만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형이상학도, 그 어떤 신념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지닌 한계이자 유일한 입장이다. 

 

 


부조리와 자살

ㆍ정말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굳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 그것은 철학의 근본적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 외에 세계가 3차원인지 아닌지, 이성(理性)의 범주가 아홉 개인지 열두 개인지의 문제는 그다음이다.

 

ㆍ나로서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 이어질 행동이 바로 그 판단의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ㆍ진리라는 것이 화형까지 무릅쓸 만한 가치는 없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든,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돌든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다. 반면에 내가 알기로는, 인생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 때문에 죽는 사람들은 많다. 

 

ㆍ나는 삶의 의미라는 것이야말로 가장 절박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모든 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사고방식, 즉 라 팔리스의 사고방식과 돈키호테의 사고방식만이 존재한다. 

 

ㆍ우리가 감정과 명료함에 동시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명증성과 서정성의 균형 덕분이다. 

 

ㆍ자살의 씨앗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마음 속에서 그 씨앗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존재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명철한 정신으로 하여금 설명할 수 없는 암흑 속으로 도망치게 만드는 이 죽음의 게임을 추적하고 이해해야 한다. 

 

ㆍ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마치 멜로드라마에서처럼, 하나의 고백이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삶을 감당할 수 없다거나, 삶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ㆍ사람은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자살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분명한 진실이다. 너무도 자명하다 보니 오히려 쓸모없는 진실이다. 

 

ㆍ'이러한 한계가 나를 나 자신에게로 인도한다. 거기서는 나를 대변하는 척하는 객관점 관점 뒤로 더 이상 숨을 수 없고, 나 자신도 타인의 존재도 내게는 더 이상 대상이 되지 못한다.' - 카를 야스퍼스

 

 

부조리한 벽

ㆍ마음속의 깊은 감정들은 언제나 의식적으로 표현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ㆍ인간은 자기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동뿐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연기를 통해서도 정의된다. 

 

ㆍ공허만이 지배하고, 연속적으로 이어지던 일상의 행위들이 줄줄이 끊어져 버리며, 이 끊어진 사슬의 연결 고리를 마음속으로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소용없는 그런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 대답은 부조리의 첫 번째 징후이다.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고, 놀라움이 동반된 이 무기력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라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무기력은 기계적인 삶의 행위들 끝에 느껴지는 것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의식도 작동시킨다. 이 무기력이 의식을 일깨우고, 그다음 상황을 촉발시킨다. 그다음이란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일상으로의 무의식적인 복귀이거나, 아니면 결정적인 자각이다. 시간이 흘러 이러한 자각의 끝에 이르면 결론이 난다. 즉 자살이거나 원상 복귀이다. 무기력이란 그 자체로는 뭔가 거북하고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나의 결론은 이 무기력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의식을 통해 시작되며, 이 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ㆍ정신의 첫 번째 단계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이다. 

 

ㆍ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리라는 의미이다. 

 

ㆍ부조리는 그것이 인정받는 순간부터 하나의 열정, 열정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열정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부조리의 열정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아는 것, 마음을 고양시키는 동시에 불태워 버리는 이 열정의 심오한 법칙을 수용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ㆍ고뇌에 빠진 인간에게 세계는 더 이상 아무것도 제공해 줄 수 없다. 

 

단 한 번만이라도 <명쾌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구원될 것이다. 하지만 열망하는 인간들은 명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게 혼돈이며, 인간이 가진 것이라곤 자신의 혜안과 자기를 둘러싼 벽에 대한 확실한 인식뿐이라고 주장한다. 

 

한 단계 더 내려가면 나타나는 것이 바로 낯섦이다. 즉 세상이 〈두껍다〉는 것을 알아채고, 하나의 돌멩이가 얼마나 낯설 수 있고 우리와 얼마나 화해 불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자연이, 하나의 풍경이 얼마나 완강하게 우리를 부정할 수 있는지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의 밑바닥에 뭔가 비인간적인 것이 자리 잡게 되고, 저기 보이는 언덕들, 온화한 하늘, 그림 같은 나무들은 우리가 거기에 입혀 놓은 신기루 같은 의미들을 순식간에 잃어버리면서 그때부터는 실낙원보다 더 까마득히 멀어져 간다. 세계의 이 원초적인 적의가 수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우리를 찾아온다. 세계는 한동안 우리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수 세기 동안 우리는 우리가 세계에 미리 부여해 놓은 윤곽과 형태들만을 이해해 왔으며, 이제부터는 우리가 그 인위적 책략을 이용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우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씌워 놓았던 가면을 벗은그 무대 장치들은 원래의 자기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우리로부터 멀어져 간다.

 

한 인간에게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 거기에 인간의 낙인을 찍는 일이다. 고양이의 세계는 개미의 세계가 아니다. 〈모든 사고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자명한 이치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철학적 자살

ㆍ<부조리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지만, <모순이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뭔가를 찾으려고 사람에게는 확실한 것 단 하나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부터 가능한 모든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뿐이다. 

 

ㆍ실패란 모든 설명과 가능한 모든 해석을 넘어서서 허무가 아닌 초월의 존재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ㆍ문제는 부조리의 상태,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보는 법을 다시 배우는 것이고, 자기의 의식을 주도하는 것이며, 하나하나의 이미지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ㆍ의식은 자기 인색의 대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라볼 뿐이다. 의식이란 관심을 기울이는 행동이다.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단 하나의 사고는 없다. 

 

이성은 사유의 도구이지 사유 그 자체가 아니다. 

 

ㆍ세계는 그저 비이성적일 뿐이다. 

 

ㆍ중요한 것은 이러한 분열과 더불어 살아가고 생각하는 것이었으며,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ㆍ알아야 할 것은 부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또는 부조리 때문에 죽는 것이 과연 논리적인가 하는 것이다. 

 

 

 


부조리한 자유

ㆍ내가 알고 있는 것, 확실한 것, 내가 부정할 수 없는 것, 내가 거부할 수 없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ㆍ결백함은 그에게 모든 것을 허락한다. 그렇게 해서 그가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이란, 오직 자기가 알고 있는것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대로의 것들에 적절히 만족하며, 확실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 확실성이야말로 부조리한 인간과 상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구원에 호소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지 알고 싶은 것이다. 

 

의식의 반항을 업애 버리는 것은 문제 자체를 회피하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부조리가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다. 

 

일관성 있는 유일한 철학적 입장의 하나가 바로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이 서로 영원히 대면하는 것이다. 반항은 불가능한 투명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항은 매 순간 이 세계에 대해 문제 제기르르 한다. 반항은 자기 자신 앞에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ㆍ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인지 아닌지를 안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인이 있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ㆍ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이면서 동시에 죽음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에 자살을 피해 간다. 부조리는 사형수의 마지막 생각의 맨 끝에서, 현기증이 날 것 같은 자신의 추락 일보 직전에도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오는 저 구두끈 같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살자의 반대말은 사형수이다.

 

ㆍ진정한 정직함이란 내게 파렴치한 삶을 요구하는 것일 터이다. 

 

ㆍ부조리와 이 부조리가 내포하는 삶의 확장은 따라서 인간의 의지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그 반대인 죽음에 달려 있다. 

 

ㆍ가던 길을 멈추는 것은 좋지 않고, 단 하나의 시각에 만족하거나 모든 정신적 능력 중에서 어쩌면 가장 미묘한 역설 ㅇ벗이 살아가기는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살아가는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

 

ㆍ나의 영역은 바로 시간이다. - 괴테

 

ㆍ용기는 구원의 호소 없이 살아가는 법과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이성은 그의 한계를 가르쳐 준다. 

 

 


돈 후안주의

ㆍ중요한 것은 명확하게 보는 것이다. .

 

 


연극

ㆍ배우는 소멸하기 마련인 일시적 상황을 지배하는 자이다. 

 

ㆍ중요한 것은 영원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력이다. - 니체

 

 


정복

인간은 그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에 따라 더욱 인간다워진다. 

 

ㆍ그렇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목적이다. 그것도 유일한 목적이다. 그가 무엇인가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 삶 속에서의 염원이다. 이제 나는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정복자들은 이따금 정복과 극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정복자들은 가장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 하고자 할 때 인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혁명의 영혼 속 가장 뜨거운 곳으로 잠겨 들어가며, 인간의 도가니를 절대 떠나지 않는다.

 

 

 

 

 

 

 

 

 

 

 



부조리한 창조

ㆍ창조한다는 것, 그것은 두 번 사는 것이다. 프루스트 같은 사람이 불안 속에서도 더듬거리며 모색해 가는 것, 꽃과 각종 태피스트리, 불안과 번민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수집해 나가는 것도 이와 의미가 다르지 않다. 그들은 모두 모방하고, 반복하고, 그들 자신의 것인 현실을 재창조하려고 애쓰고 있다.

 

 

 

 


철학과 소설

ㆍ생존한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은 성찰하는 것 못지않게 제대로 느낀다는 의미이다. 

 

만약 세계가 명쾌하다면, 예술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키릴로프

ㆍ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ㆍ존재는 거짓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하다. 

 

 


내일 없는 창조

ㆍ통일성을 포기하는 모든 사고는 다양성을 촉발시킨다. 그리고 이 다양성이 바로 예술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시지프 신화

 

ㆍ신화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상상력이 그것을 살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ㆍ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아래로 되돌아가는 그 시간, 그 짧은 휴식 시간 동안이다. 그토록 바위에 바짝 붙어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이다! 무겁지만 일정한 발걸음으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고통을 향해 다시 걸어 내려가는 그 남자가 보인다. 호흡과도 같고, 그의 불행만큼이나 분명하게 되풀이되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 정상을 떠나 신들의 누추한 소굴을 향해 조금씩 빠져 들어가는 이 순간순간, 그는 그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ㆍ오이디푸스는 〈나는 모든 것이 다 잘되었다고 판단한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신성하다. 이 말은 인간의 저 길들여지지 않고 한계가 정해져 있는 세계 속에 울려 퍼진다. 이 말은 모든 것이 다 소진되지는 않으며, 소진되지도 않았음을 가르쳐 준다. 이 말은 불필요한 고통을 원하며 만족을 모른 채 이 세상에 들어왔던 신을 세상 밖으로 몰아낸다. 또 운명을 인간의 문제로, 인간들끼리 조율해야 하는 문제로 만들어 버린다.


ㆍ시지프의 말 없는 모든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고, 그의 바위도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그의 고통을 조용히 바라보면 모든 우상은 입을 다물게 된다. 느닷없이 자기 침묵으로 되돌아간 세계 속에서, 이 땅의 수많은 목소리, 경탄에 마지않는 작은 목소리들이 수없이 솟아난다. 

 

 

 

부조리의 귀결: 반항, 자유, 열정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