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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 무라카미 하루키

by mubnoos 2025. 5. 19.

 

 
• 잠이 오지 않은 뒤로 내가 생각한 것은, 현실이란 참 얼마나 손쉬운가, 하는 것이었다. 현실을 감당하는 일 따위, 너무도 간단하다. 그것은 그저 현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집안일이고 그냥 성교이고 그냥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기계의 작동과 마찬가지여서 한 차례 운용하는 절차를 익혀버리면 그다음은 끝없는 반복일 뿐이다. 이쪽 버튼을 누르고 저쪽 레버를 당긴다. 눈금을 조절하여 뚜껑을 덮고 타이머를 맞춘다. 그냥 그것의 반복이다.

• 잠이란 휴식이다. 그것뿐이다. 차의 엔진을 꺼버리는 것과 같다. 줄곧 휴식 없이 엔진을 작동하면 얼마 못가 망가져버린다. 엔진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열을 발생하고 그렇게 고인 열은 기계 자체를 피폐하게 한다. 그래서 방열을 위해 반드시 쉬게 해주어야 한다. 엔진을 끄고 쿨다운시킨다. 그것이 수면이다. 인간의 경우, 그것은 육체의 휴식이면서 동시에 정신의 휴식이기도 하다. 몸을 눕히고 근육을 쉬면서 동시에 눈을 감고 사고를 중단한다. 그랬는데도 남아 있는 사고는 꿈이라는 형태로 자연 방전한다.

• 인간은 사고에 있어서도 육체의 행동에 있어서도 일정한 개인적 경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행동이나 사고의 패턴을 만들어나가는 존재이고, 한번 만들어진 그런 경향은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바뀌지 않는다. 즉 인간은 그러한 경향의 감옥에 갇힌 채 살아가는 셈이다.